같은 공간에서 읽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믿고 싶은...
‘도서관 노마드’라는 소설집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도서관을 유랑하는 자, 라는 설정이 갖는 아스라한 기품이 맘에 들었다고나 할까.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도서관을 가는 일은 같은 도서관을 매일 가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다른 세상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곳의 모든 책을 모두 읽은 것이 아니라면, 매일 같은 공간을 향하더라도 그곳에는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당신의 트라비」.
“나도 하나 물을까요? 소설의 시대는 갔다고 하더군요. 요즘 독자에게 읽히는 소설은 단지 몇 퍼센트에 불과할 겁니다. 그 몇 퍼센트에 속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대체 당신은 왜 소설을 쓰는 겁니까?” (p.30) 동독의 국민차였던 트라비와 동독에서 만났던 한 사내, 그리고 이십여년이 흐른 후 이제 소설을 쓰고 있는 내가 한국에서 만나는 사람들... 세상을 읽어내는 일은 보상이 따르지 않더라도 멈출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배롱나무 아래에서」.
《남의 속도 모르면서》라는 2011년에 발간된 테마 소설집에 실려 있던 소설이다... 병원에서 상담을 받는 그 남자의 첫사랑 그리고 그 남자가 거세 예찬론자가 된 사연이 기막히다. 모두들 받아들인다고 하였으나, 결국 성기가 결핍된 그녀는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이라니... 그리고 여기에도 유에프오가 등장하니, 결국 섹스는 지구인의 손을 떠나 우주인의 손으로 구원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인가...
「도서관 노마드」.
“사이코와 도서관. 의외로 잘 맞는 조합이다. 취업 낭인, 퇴출된 회사원, 망한 자영업자, 돈 없는 노인, 엘리트 룸펜, 무명 번역가, 무명 소설가, 지식 프롤레타리아, 프리터들이 도서관과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듯이... 이 시대 떨거지들의 피난처... 우리 시대 무소속들의 안식처... 대한민국 비주류들의 교두보.” (p.78) 도서관을 유랑하는 무명 소설가 사내, 지금 그는 대필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사내가 만나는 도서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생각한 도서관과는 다르지만, 그곳 세상에서 펼쳐지는 작은 이야기들이라고나 할까...
「S편의방」.
“여자는 슬플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꿈같은 것, 손아귀로 물을 움켜쥐는 행위 같은 것이다. 애초에 물은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움켜쥐려 해도 단지 차가운 감촉으로만 남는다. 삶에 새겨지는 추억과 상처들도 물의 감촉이거나 감촉의 기억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pp.126~127) 인형방이라는 신종 섹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여자... 살아 있지 않은 인형들과 관계를 맺는 남자들이라는 설정이 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모던한데, 실제 소설 내용은 오히려 복고풍이라고나 할까...
「텔레토킹」.
“... 우리 마음에도 입과 귀가 있단다. 그걸 상대의 마음에 향하게 해야 해. 그러면 마음이 하는 말이 들리거든. 처음엔 아주 약하고 희미하게 들려. 엄마의 가슴에서 나는 박동 소리, 소라에서 들리는 바다 소리처럼 희미하게 말이야. 그래도 끈질기게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소리는 조금씩 커진단다. 그 소리가 네 머리에 가득 차면 네가 말할 차례가 되었다는 뜻이야.” (pp.148~149) 아주 어린 시절 집에 갇혀 주인집의 가영이 누나와 대화를 한 기억이 있는 그가 내게 전하는 텔레토킹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실 가영이 누나는 벙어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내와의 문제에 봉착한 나는 텔레토킹 능력을 지닌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전달해야 하는 것은 드러나는 말이 아니라 드러나 있지 않은 말에 더욱 정확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악행의 자서전」.
“젊은 시절, 악마에게 고해를 한 적이 있다고 황 회장은 말했다. 신부님이 아닌 악마에게 하는 고해라니. 그건 악한 일이 아닌 선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뉘우치는 의식이었다...” (p.161) 황 회장의 자서전을 대필하고 있는 나는 황 회장으로부터 자신의 치부를 포함한 자서전을 내야 한다는 부탁을 받지만 결국 그가 죽은 후 그의 측근들의 만류를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저지른 악행들과 대면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와 동시에 김 선배와 그의 아내 윤에게 가한 자신의 악행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의 고해를 들어줄 누군가와 맞닥뜨릴 수 있을까.
「뇌비게이션」.
“... 인생을 모두가 의욕적이고 야심 있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닐 터였다. 더구나 의욕적인 것과 야심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그에게도 충분히 의욕적인 면이 있었다. 의욕적으로 책을 읽었으며 의욕적으로 야심을 포기했다...” (p.204) 보다 나은 조건의 남자를 뿌리치고 남자와 살고 있는 아내, 그 아내는 종종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남자는 그러한 아내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쪽지와 자신의 뇌비게이션에 의지하여 그 여자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오늘 이 남자는 자신이 자신의 여자를 이번에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없다. 자신의 뇌비게이션을 믿을 수가 없다.
「역광」.
“... 당신이 그랬잖아. 우리들 눈은 보고 싶은 것만 가려서 본다고. 어쩌면 우리도 상대방의 보고 싶은 모습만 보아왔던 게 아닐까.” (p.239) 광고 사진을 찍으며 연명하던 내가 의뢰받은 잡지의 표지 사진, 행복해 보이는 부부를 사진찍기 위한 여행... 그러나 이 부부는 지금 이혼 직전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그들을 찍어서 표지에 실을 사진을 만들어내야 한다. 역광이라는 것, 모든 표정을 지워버리는 빛과 같은 것, 그러나 그 역광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 대신 다른 것을 보게도 되는 것 아닐까.
생각처럼 도서관에 관한 글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나마 실린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도 그저 어두운 일상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또 다른 세상을 읽어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세상의 잣대로 보았을 때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 아마도 작가 자신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고 보이는 인물들의 완성되지 못한 꿈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그래서 조금 힘겹게 읽혔다.
은승완 / 도서관 노마드 / 문학사상사 / 267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