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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우리의 빼앗긴 날개옷을 되찾기 위한 현대 자본주의 분석의 입문서...

by 우주에부는바람

무엇보다 철학자 강신주의 친절함이 마음에 든다. 만약 강신주의 친절한 독해를 거치지 못했다면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서구 현대 철학자들의 개념어들과 상대하느라 녹초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그들의 발언을 발췌하고 이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설명한다. 설명이 부족하다 싶으면 맞춤한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들의 이해를 돕는다. 그것은 그가 이 책을 쓴 의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자신의 자유를 빼앗긴 줄도 모르면서 점점 더 나무꾼에게 의존해가는 선녀. 그리고 나무꾼과의 삶을 최상의 행복이라고까지 생각한 선녀. 이런 선녀는 자본주의에 길들어버린 우리 모습과 너무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한 선녀로부터 자유를 되찾은 선녀가 되려면 반드시 날개옷이 필요했듯이, 자본주의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려면 여기에서 다룬 인문학자 여덟 명의 사유 또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날개옷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그들의 사유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왔으며, 또한 진정한 자유를 얼마나 오랫동안 잃고 살아왔는지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p.424)


그러니까 이 책은 이미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지만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사실을 자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친절한 철학가는 이를 위하여 소설가인 이상과 트루니에, 시인인 유하와 보들레르, 철학자인 짐멜과 벤야민, 보드리야르, 브르디외를 불러낸다. (물론 책에는 이들 이외에도 다양한 인문학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둘씩 짝을 이루어 자본주의와 도시의 관계 (이상과 게오르그 짐멜), 유행·매춘·도박 등으로 확인 가능한 자본주의의 속성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 우리의 내면에 각인된 자본주의의 습성 (미셸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소비사회로서의 자본주의가 갖는 논리와 그 탈출 가능성 (유하와 보드리야르) 에 대하여 우리에게 성실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과정은 저자인 강신주를 통함으로써 깔끔하고 유려해진다.


“... 타인에 대한 냉담한 거리두기, 다시 말해 상호간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도시적 삶의 양식이 ‘자유’라는 감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고독’이라는 치명적인 질병도 함께 도사리고 있지요. 도시인들은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서 ‘자유’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답답함’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고독’을 감내해야 합니다...” (p.92)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니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양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호 불간섭으로 규정되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singularity)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 시대보다 더욱 강해집니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설명합니다...” (p.97)


“... 전자본주의 시대든 자본주의 시대든 인간에게는 특이한 허영심, 즉 ‘구별짓기(distinction)’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짐멜이 대도시의 삶에서 보았던 ‘질적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 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된 현상인 셈입니다... 따라서 짐멜이 니체를 통해서 긍정하고자 했던 ‘질적 개인주의’는 인간이 새로운 역사로 나아갔다는 진보의 표시로 보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표현하려는 자유가 실현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생산의 차원이 아니라 소비의 차원에만 국한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p.99)


식민지 시대 소설가 이상이 바라본 경성을 끌어들인 첫 번째 논의에서는 어떻게 아무런 실제적 가치도 갖고 있지 않은 화폐가 우리들을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심층적으로 살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화폐의 가치와 도시의 생성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 데 주력한다. 이와 함께 도시 속의 개인주의를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로 나눠서 생각한 짐멜의 논의를 통하여 자본주의가 바로 그 ‘질적 개인주의’에 다다른 우리들을 통해 더욱 고도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욕구나 욕망은 모두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욕망은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여전히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구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 욕망이란 욕구가 기묘하게 뒤틀려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욕망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지요...” (p.144)


“... 성적인 것을 포함한 일체의 욕망들은, 그 욕망의 충족을 미룬 우리의 의지로 더욱더 강화됩니다... 패션이란 기본적으로 욕망의 충족을 뒤로 미루고 그것을 갈망하는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욕망 구조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시선이었습니다.” (p.155)


두 번째 논의는 파리의 보들레르로부터 비롯된다. 보들레르 당대인들이 품을 수 있었던 욕망의 다양한 측면들을 살핌으로써 저자는 자본주의가 갖는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열중한다. 그리고 유행과 매춘과 도박이라는, 욕망 투영의 가장 적합한 도구들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맨 얼굴을 보여주려 애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얼굴을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시선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새로운 환경이 자신의 아비투스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부, 혹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p.254)


“...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pp.284~285)


세 번째 논의는 트루니에의 소설 『방드리드, 태평양의 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패러디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외딴 섬에서조차 버리지 못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습성을 통하여 이미 우리들에게 각인된 자본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라는 개념을 통하여 현재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신 내부를 구분짓고 또 그 구분짓기를 통하여 욕망을 추동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 『팡세』, 1670


네 번째 논의는 시인 유하의 눈에 비친 압구정동을 통해 이미 소비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의 속성을 살피고,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따라 ‘생산’이 아니라 ‘소비’에게 자리를 내준지 오래인 자본주의의 현재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특히 이 ‘소비’ 중심의 사회에 자리 잡은 우리들의 허영에 대한, 오래전 이를 간파한 파스칼의 위의 문장은 우리들의 허위 의식을 향하여 단도직입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마냥 비극적이고 허무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보드리야르가 사물을 구분하는 네 가지 방식 그러니까 도구, 상품, 상징, 기호로서의 사물 중 ‘상징’이라는 측면에 주목한다. 이용 가치나 거래 혹은 신분 구분의 도구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증여의 차원’에 가까운, 사물의 ‘상징’이라는 측면을 통하여 희망을 구해보자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잉여분을 서로를 향하여 나눌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결말이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으로부터 벗어나 현재를 향유하고자 하는 첨예한 사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을 숙독한 다음이라면, 우리의 잊고 있던 날개옷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니 저자의 의도는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다.



강신주 /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 프로네시스 / 454쪽 / 20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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