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지구와 모든 생명체의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면...
*2013년 4월 2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굉장한 혼돈 속에서 한 달여의 시간을 보냈다. 육 년여의 기간 동안 지탱해 오던 회사의 존폐 여부를 결정해야 했기에 무언가를 읽는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만약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없었다면 거의 책을 읽지 못하고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독특한 작가의 광활한 책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좋은, 하지만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놀라운 사실들과 대면할 수 있는 책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책의 중간쯤을 불쑥 펼쳐 보겠다. 227페이지이다. 이 페이지에서 알 수 있는 정보들은 이렇다.
지구 표면에서 중심까지의 거리는 6,334킬로미터이다. 만약 지구의 중심까지 우물을 파고 벽돌을 떨어뜨린다면 45분이면 중심에 닿을 것이다. 남아프리카 금광 중 한두 곳은 3킬로미터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광산은 지표로부터 400미터 정도가 고작이다. 1906년 아일랜드의 지질학자 올덤은 지진기록을 통해 지진이 충격파가 지구 내부로 가다가 어느 순간 비스듬한 각도로 튕겨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크로아티아의 지진학자 모호로비치치는 그 반사파를 통해 지각과 맨틀 사이의 경계면을 발견했다. 1936년에는 뉴질랜드의 지진을 연구하던 덴마크의 학자 잉게 레만이 지구에는 내핵과 외핵의 두 가지 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처럼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와 그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이 책의 저자인 빌 브라이슨이 과학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아주 정확하게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책의 제목은 책의 내용과 호응한다. 그리고 이 역사는 바로 생명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 화학적으로 볼 때 생명체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다.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약간의 칼슘, 소량의 황 그리고 다른 평범한 원소들이 조금씩만 있으면 된다. 동네 약국에서 찾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의 경우에, 유일하게 특별한 점은 그것들이 당신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물론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기적이다.” (p.12)
책은 모두 여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주의 탄생 그리고 태양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2부는 지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구가 만들어진 과정과 지구를 알기 위해 사용되었던 근대의 여러 과학을 소개한다. 제 3부는 20세기의 이야기로 현대물리학의 기초가 된 여러 이론들을 살핀다. 제4부는 소행성과 혜성, 그리고 지진과 화산을 비롯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제5부는 지구에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제6부는 지구의 기후와 인류의 역사를 살핀다.
“약 46억 년 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지름이 약 240억 킬로미터 정도인 거대한 기체와 먼지 덩어리의 소용돌이가 뭉쳐지기 시작했다. 태양계에 존재하는 질량의 99.9퍼센트는 함께 뭉쳐져서 태양이 되었다. 그리고 남아서 떠돌아다니던 물질들 중에서 아주 가까이 있던 두 개의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정전기 힘에 의해서 합쳐졌다. 그것이 우리 행성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p.52)
하지만 이 딱딱해 보이는 과학적 발견이나 과학 이론들이 이 독특한 에세이스트의 손을 타는 순간, 아주 재미있는 호기심 천국류의 이야기가 된다. 물론 간간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설명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은 그냥 스리슬쩍 넘어가도 좋다.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서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원자들은 신기할 정도의 영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수명이 아주 긴 원자들은 정말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 당신의 몸 속에 있는 원자들은 모두 몸 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몇 개의 별을 거쳐서 왔을 것이고, 수백만에 일는 생물들의 일부였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우리는 정말로 엄청난 수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고 나면 그 원소들은 모두 재활용된다. 그래서 우리 몸 속에 있는 원자들 중의 상당수는 한때 셰익스피어의 몸 속에 있었을 수도 있다... 부처와 칭기즈 칸, 그리고 베토벤은 물론이고 여러분이 기억하는 거의 모든 역사적 인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도 각각 수십억 개씩은 될 것이다(원자들이 재분배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리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 속의 인물이라야만 한다. 당신이 아무리 원하더라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몸 속에 있던 원자들은 아직 당신의 몸 속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p.148)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사실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종종 철학적 사고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우리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 원자가 또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는 설명은 그저 과학에 머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유머 같기도 하지만 조금만 비틀어 생각하면 철학적 사유의 씨앗이 될 것도 같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의 경연장이 바로 이 책이다.
“... 우리는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도 없고, 거리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가 확인도 할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채워진 채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다...” (p.188)
한꺼번에 읽지 않아도 좋다. 화장실에 놓고 간간히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다. 침대 맡에 두고 짬짬이 읽어도 나쁘지 않겠다. 뒤에 붙은 색인이 있으니 거기서 낯이 익은 과학자의 이름을 찾아 그 부분만 살펴보는 것도 상관없다. 어떻게 읽든 이 책을 들여다보는 순간 지금 내가 당면해 있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라고 여겨지던 문제는 아주 사소하고 시시한 무언가로 생각되고 말 것이다.
빌 브라이슨 / 이덕환 역 / 거의 모든 것의 역사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 까치 / 558쪽 / 2003 (2003)
ps. 종종 지구의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요약 정리한 글을 읽고는 하는데, 빌 브라이슨의 책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온다. 재미있으니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 만약 45억 년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를 하루라고 친다면, 최초의 단순한 단세포 생물이 처음 출연한 것은 아주 이른 시간인 새벽 4시경이었지만, 그로부터 열여섯 시간 동안은 아무런 발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루의 6분의 5가 지나버린 저녁 8시 30분이 될 때까지도 지구는 불안정한 미생물을 제외하면 우주에 자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 후에 마침내 해양 식물이 처음 등장했고, 20분 후에는 최초의 해파리와 함께 레지널드 스프리그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 발견했던 수수께끼 같은 에디아카라 동물상이 등장했다. 밤 9시 4분에 삼엽충이 헤엄치며 등장했고, 곧 이어 버제스 이판암의 멋진 생물들이 나타났다. 밤 10시 직전에 땅 위에 사는 식물이 느닷없이 출현했다. 그리고 하루가 두 시간도 남지 않았던 그 직후에 최초의 육상동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구는 10분 정도의 온화환 기후 덕분에 밤 10시 24분이 되면서 거대한 석탄기의 숲으로 덮였고, 처음으로 날개가 달린 곤충이 등장했다. 그 숲의 잔재가 오늘날 우리에게 석탄을 제공해주었다. 공룡은 밤 11시 직전에 무대에 등장해서, 약 45분 정도 무대를 휩쓸었다. 그들이 자정을 21분 남겨 둔 시각에 갑자기 사라지면서 포유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간은 자정을 1분 17초 남겨둔 시각에 나타났다. 그런 시간 척도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의 역사는 겨우 몇 초에 해당하는 기간이고, 사람의 일생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 이렇게 가속화된 하루에서 보면, 대륙은 잇따라서 불안정하게 미끄러지면서 서로 충돌한다. 산들이 솟았다가 사라지고, 바다가 등장했다가 말라버리고, 빙하가 커졌다가 줄어들기도 한다. 그리고 대략 1분에 세 차례 정도씩 맨슨 크기나 그보다도 더 큰 운석이나 혜성이 충돌하면서 끊임없이 불꽃이 번쩍인다. 그렇게 찧어대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도대체 생명이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사실 오랫동안 견뎌내는 생물은 많지 않다.” (pp.353~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