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빙산같은 마음의 짐 녹아 내리면 나도 거기에...
*2013년 3월 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황금 같은 삼일의 연휴인데 집과 수영장, 집과 찜질방 다시 집과 수영장으로 이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 사이 함께 일하는 동료는 태국의 파타야에서 마이 피플로 말을 건다. 태국에서 샀다는 원피스를 걸치고 있는 사진을 올린다. 오리발을 끼고 먼 바다로 나간 이야기며, 태국의 수상 시장은 런닝맨 촬영 이후 입장료를 받기로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두서없이 날아온다. 난 이야기를 다 듣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헬스장으로 향한다.
그 대신 요시다 슈이치가 일본의 항공사 ANA 기내 잡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이라고 했지만 위키를 뒤져보니 ANA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기고한 글을 모은 것으로 보이는) 산문집을 읽는다. 잡다하지만 재미있는 꽁트들과 함께 방콕, 루앙프라방, 오슬로, 타이베이, 호치민, 스위스 등에서 생긴 일쯤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책이다. 사실은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책을 읽는 중인데, 훌쩍 여행조차 떠나지 못하는 나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아, 자꾸 이런저런 가벼운 책들을 독서의 중간에 끼워 넣고 있는 중이다.
“뭔가 말이야, 정말로 후련해져, 스트레스가 쌓여 있는 것도 아닌데, 공항에 가서 적당한 비행기를 타고 모르는 마을에 다녀오면 왠지 개운해.” (p.49)
물론 이 책을 읽어서 마음이 후련해지지는 못했다. 대신 오래전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기는 하였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문창과로 재입학을 하겠다며 등록을 포기한 아내의 그 등록금을 염두에 두고, 청량리역의 야간 완행 열차를 탄 적이 있다. 술에 취해 기억도 혼미하였던 나와 어린 아내는, 강릉이 아니고 꼭 동해여야 한다는 나의 억지주장에 말려들어 새벽녘 동해역에 떨어졌다. 그렇게 동해에 도착한 뒤에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내게 혼곤하게 들려오던 강원도 사투리는 참으로 난감하였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지금 이 순간의 스트레스를 슬쩍 옆으로 밀치는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친한 친구였어?’ 라고 물으면 당당히 ‘그럼’ 하고 끄덕일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만약 그 당시 누군가에게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그 자리에서 둘다 입을 모아 ‘설마. 이런 놈하고 내가 왜’ 하고 당당히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친구였지 않을까 생각한다.” (p.110)
여행하면 바로 튀어나오는 우탕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도 하나 떠올랐다. 한 달 전쯤인가 몇 년 만에 친구 장인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 친구의 방에서 벽에 붙은 세계 지도를 보며 여행을 꿈꾼 적이 있다. 막연한 것이 아니었던지 세계 지도 옆에 비행기 시간표까지 붙여 놓았던 친구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돈이 모이면 여행을 떠나는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인도를 좋아하는 녀석은 사진도 꽤나 찍는데, 겉모습과는 달리 (자기는 비 雨 자에 끓일 燙 자라고 우겼지만 털이 보숭보숭한 녀석의 우탕은 오랑우탕의 줄임말이었다) 섬세한 감수성이 짙은 사진들을 찍어서 보여주고는 한다.
그런저런 기억들을 떠올리느라 시간을 지체하기는 했지만, 침대에 드러누운 채 얼빠진 표정으로도 금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기내 잡지에 실린 짧은 글들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여행을 가는 길이나 돌아오는 길에 읽게 된다면 뭔가 또 다른 감흥이 생길 법한 글들이기는 하다. 봄이 오고, 빙산 같은 마음의 짐이 녹아 내리면 훌쩍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호사를 누릴 날도 있겠지, 그 때는 내 노트에도 이런 작은 글들 몇 개쯤 실려 있게 될 테고...
요시다 슈이치 / 권남희 역 /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あの空の下で) / 은행나무 / 217쪽 / 2013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