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긍정' 속에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대의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2012년 8월 29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일주일 정도 불면의 밤을 보낸 뒤였을 것이다. 물론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 서너 시간의 잠만으로 스트레스 가득한 업무와 오기와도 같은 운동, 그리고 독서와 몽상의 시간을 버텨내는 중이었다. 게다가 난 그 불면의 원인을 확정지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원인이 존재하였지만, 또 그것들 중 어느 것 하나로 원인을 특정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비몽사몽간의 시간을 견디다가, 도움이 될까 하여 어느 오후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소설 코너에서 시작하여 에세이 코너를 거쳐 인문학 코너를 순례하는 중에 이 책을 발견하였다. <피로사회>라... 그러니까 그때 난 굉장히 피로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 책 <피로사회>가 나의 불면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주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재독 철학가인 한병철이 <피로사회>를 통하여 보여주는 (책은 이 철학가가 독일어로 발표한 논문이며, 그래서 역자가 따로 있다) 사회 분석은 충분히 의미있고 유용하였다. 불면이라는 결과를 놓고 개인적으로 따져보는 원인의 분석이라는 틀은, 저자의 글을 통하여 과거와는 달라진 사회 전반의 피로 양상에 대한 파악이라는 새로운 사회 해석의 준거틀을 제공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던 것이다. 냉전 역시 이러한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자체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장치Dispositiv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p.12)
저자는 ‘피로사회’에 대한 접근을 위하여 논문의 맨 첫장에서 먼저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우세하였던 과거와 그러한 패러다임으로는 분석이 불가능한 현재를 구분한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을 통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하였던 것이 과거의 우리였다면 이제 우리들은 (‘세계화’라는 전세계적 기저 속에서) 저자가 ‘일반적인 난교 상태’라고 부르는, 담론과 생활 모두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는 일종의 ‘혼성화 경향’ 속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사회를 과거의 ‘규율사회’와 구분되는 ‘성과사회’라고 칭한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Disziplinargesellschaft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Leistungssubjekt’라고 불린다...” (p.23)
저자가 말하는 ‘성과사회’는 과거의 억압적인 사회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들도 ‘복종적 주체’가 아닌 ‘성과주체’로 작용하게 된다. 과거처럼 생존을 위하여 어쩔 수 없었던, 그리고 생산력 극대화를 위하였던 강압적인 노동 대신 우리는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라고 저자가 말하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사회 분석을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저자가 글을 발표한 독일의 노동, 노동자, 노동상황과 우리의 그것을 등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pp.43~44)
다른 사람의 강제가 없음에도 스스로를 ‘성과’라는 틀에 얽어매어 착취하는 것이 이 ‘성과사회’의 ‘성과주체’가 갖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비하여 훨씬 큰 자유를 가지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 자유를 스스로를 옭아매는 데 사용하는 ‘역설적 자유’는 그래서 우리들을 (과거 면역학적 패러다임 속의 우리들이 주로 바이러스성 병으로 고생한 것과 달리) 정신적인 병증에 시달리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p.66)
저자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성을 대신하는 과잉의 긍정성으로 무장한 ‘성과주체’로 이루어진 억압적인 사회를 대체하게 된 ‘성과사회’를 ‘피로사회’로 규정한다. 이는 절대적인 노동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설명하는데 적합해 보인다. 부과된 목표를 완수한 뒤의 성과가 아니라 스스로가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성과를 초과달성하도록 할 것을 독촉하는 자기 계발서와 그것을 읽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우리들을 보면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피로사회’라는 결론의 도달에 앞서, 생각 가득한 과잉의 활동 대신 생각 없는 깊은 사색의 중요성을 내비친다.
“무위nicht-zu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pp.53~54)
물론 얇은 논문인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내 피로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거나 불면이 사리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지는 못하였다. (나의 피로의 원인 중에는 이 ‘성과사회’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운영 중인 사업체, 이 ‘긍정 과잉’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부정의 논거를 양산하는 진중권의 ‘규율사회’형 트윗으로 인한 짜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끊임없이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저자의 논문 속 내용이 대한민국 사회를 포함한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많은 논거를 제공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사회의 이해와 해석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한병철 / 김태환 역 / 피로사회 (Müdigkeitshesellshaft) / 문학과지성사 / 128쪽 / 2012 (2010)
ps. 책에는 <피로사회>라는 논문과 함께 <우울사회>라는 저자의 강연원고가 함께 실려 있다. 아마 워낙 얇은 논문을 책으로 만들다보니, 이렇게 한 꼭지를 더 넣어야 하는 형식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지만 <피로사회>의 내용을 좀더 부연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자아피로가 아닌 치유적인 피로, 분열적이고 고립된 피로가 아닌 우리-피로, 탈진의 피로가 아닌 무위의 피로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고나... 이와 함께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철학가가 사용하는 ‘호모 사케르’ (Homo sacer, 로마 시대의 특이한 죄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회정치적인 삶을 박탈당한 채 생물학적 삶만을 가진 존재이다.) 개념에 대한 반박을 통한 사회 분석이 중요하게 시도되고 있는데 나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