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하고 깔끔하게, 소소하고 후미진 세상의 주변부를 들여다보는...
오랜만에 정갈하고 깔끔한 단편들을 읽은 느낌이다. 맛깔스러운 단어의 사용도 그렇거니와 구구절절 길어지지 않는 문장들도 단편 소설의 정석에 가깝다고나 할까. 얼마전 《소설가로 산다는 것》의 리뷰를 쓰면서 언급한 직장 동료, 가 아니라 지인이나 아끼는 후배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하게 어필을 한, 그녀가 지금 작가로부터 소설을 배우는 중인데, 이렇게 글을 쓰는 작가에게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숲의 대화」.
‘죽어 젊은 도련님이 살아 늙은 그를 응시한다’라는 문장이 둔중한 울림을 준다. 신념에 따라 산으로 오른 젊은 도련님은 사랑을 위하여 그를 따라 산에 올랐던 여자를 다시 내려보낸다. 그렇게 산을 내려온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었고, 젊은 도련님은 그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상이나 신념 혹은 계급이 난무하던 시기를 지나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당연하지만 그것들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것은 사람이고, 그 사람들을 사람으로 온존케 하는 사랑 또한 영웅적인 것이니...
「봄날 오후, 과부 셋」.
“봄바람이 앙탈하는 아이처럼 마당을 휩쓴다. 어지간한 바람에는 끄덕도 않던 남보라 빛 수국마저 미친년 널뛰듯 몸을 뒤챈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무거운 꽃송이가 뚝 부러질 것만 같다. 가만 보니 그것은 수국이 아니라 빨랫줄에서 펄럭거리는 남보라 빛 치마다...” (p.37) 이 작가의 대부분의 단편들은 그 첫 문장이 아주 짧다. 그 짧은 문장들의 나열로 꽤 선연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학창시절에서 이제 나이 든 과부가 된 지금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 명의 여학생이 나눈 소소한 우정의 이야기들이 그 짧은 문장들을 통해 나긋나긋 전달된다.
「천국의 열쇠」.
‘어설픈 몸’을 지니고 있는 나는 아버지에게 구박을 당하고, 또 옆집 길호 형으로부터 갖은 린치를 당하였으나 자신만의 천국, 3000평의 헛개나무 밭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길호 형으로부터 몰매를 맞던 베트남 신부 호아를 자신의 천국으로 들이고, 그곳의 열쇠를 건넨다. 이 땅의 모든 어설픈 이들에게 이러한 천국, 혹은 천국으로 통하는 열쇠 하나쯤 갖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2009년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다.)
「목욕 가는 날」.
감정의 굴곡 드러내는 가파른 에피소드들이 없거나, 에피소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표현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지 않는 것 또한 이 작가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이 작가의 단편들을 억센 향신료가 첨가되지 않은 우리네 구수한 음식같은 것으로 만들어준다.하지만 이것이 장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으로도 작용하는 것 같다. 나이 든 두 딸과 노모의 소소한 하룻동안의 목욕탕 나들이를 따라가는 이번 단편 또한 그렇다. 2011년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 장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단편이 대상 수상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 약점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리라.
「브라보, 럭키 라이프」.
머리도 명석하고 말도 잘 듣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다. 호흡기를 떼라는 의사의 권유를 물리치고 끝끝내 자식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에 전 생애와 전 재산을 걸고 있는 아버지... “씨발! 벵신 자석만 끼고돌다가 인자 산 자석 죽는 꼴 보게 생겠네, 조오컸소!” (p.147) 그 자식이 호흡기를 떼고서도 연명할 수 있게 된 것도, 손가락이라도 꿈틀거리게 된 것도, 모두 행운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살아 있는 자식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핏줄」.
몇 차례의 이혼 끝에 결국 베트남 처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아들... 실패한 결혼을 거울 삼아 투박하지만 성실해 보이는 까만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이한 시아버지는 점차 그 까만 색이 마음에 걸리고, 그 며느리를 반대하였던 시어머니와 아들은 점차 그녀에게 마음이 쏠린다. 핏줄을 이어야 한다는 염원은 어느 순간 되도록 어엿한 핏줄이어야 한다는 또 다른 조건 짓눌리는 형국이라고 할까.
「혜화동 로터리」.
“... 빨치산은 빨치산대로 켈로는 켈로 대로 살기 위해 먹었다...” (p.203)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 미군의 켈로 부대 일원으로 참가하였던 박과 최는 그렇게 서로에게 시비를 걸고 그 시비에 맞장구를 치면서 한 세상을 살았다. 그들 사이에 일종의 조율자로 존재하는 김도 마찬가지이고... “... 제 몸뚱이보다 더 무거운 한 삶을 지고 그 삶에 짓눌려 허덕이던 그들의 무게 따위 존재도 하지 않았던 듯, 거리는 평온하다.” (p.206) 마지막 문장이 참 무겁고 덧없게 들린다.
「인생 한 줌」.
인생 살다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지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설 속의 그 또한 그러한 순간을 가젝 되려는 찰나, 자신의 산비탈 밭에서 거대한 바위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집념처럼 그 바위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한 삽질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바위가 형체를 잡아가던 어느 날 그는 또다른 순간에 직면한다. “... 그가 생명을 주었다고 믿었던 거대한 거북과 봉황은 몇 번을 보아도 그저 기이하게 생긴 거대한 돌덩어리일 뿐이다.” (p.232)
「즐거운 나의 집」.
시골에 거처를 잡고 조용히 글을 쓰려던 나의 욕망은 이웃집 황씨네로 인하여 완전히 짓밟힌다. ‘즐거운 나의 집’이 되리라고 믿었던 그곳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지옥도 이야기라고나 할까.
「나의 아름다운 날들」.
<즐거운 나의 집>과 맥락이 비슷한 일종의 아이러니 가득한 소설이다. 잘난 덕에 잘 사는 것이고, 못 사는 이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이 스스로 귀한 김여사의 행태에 코웃음이 나오는데, 또 이런 이들의 이러한 전혀 교양스럽지 않은 교양이 난무하는 세상이니 그저 웃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절정」.
노숙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도시 빈민자 그룹의 이야기이다. 그나마 노숙에서 벗어나 고시원 생활에 안착한 남자가 있는가하면, 지방의 어느 곳에선가 공부하는 딸내미를 위해 고시원 비용마저 아끼기 위해 노숙으로 나서야 하는 사내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고시원에서도 어느 순간 숨죽인 절정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이 내는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는 또 다른 인간 군상이 있다.
정지아 / 숲의 대화 / 은행나무 / 349쪽 / 201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