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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갑옷을 벗고 났더니 존재와 부재의 경지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by 우주에부는바람

이탈로 칼비노의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이번에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이다. 이교도들과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전쟁터를 배경으로 하여 갑옷으로만 존재할 뿐 알맹이는 가지고 있지 않은 신비로운 기사 아질울포를 중심에 세우고, 복수를 위하여 기사 지망생이 된 람발도, 그리고 아질울포의 하인이 되는 미치광이 구르둘루 등의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 그러니까 세상은 모든 것을 분해시켜 버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뒤덮어버리는, 형태도 없는 거대한 죽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죽이 되고 싶지 않아요, 도와주세요!> 람발도가 막 이렇게 소리를 치려고 하다가 이런 속물스러운 광경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무감각하게 팔짱을 끼고 자기 옆에 서 있는 아질울포를 보았다. 람발도는 아질울포가 자신의 불안을 결코 이해해 줄 수 없으리라고 느꼈다. 하얀 갑옷의 기사를 볼 때 전해져 오던 고뇌는 구르둘루를 보면서 느끼는 정반대되는 새로운 고뇌와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람발도는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p.69)

소설은 이렇게 까다롭고 규정에 얽매이는 존재인 아질울포와 반쯤 미치광이로 그려지고 있는 구르둘루를 주인과 하인이라는 근거리에 배치시키고 있다. 갑옷이라는 딱딱한 겉모습으로만 존재하며 엄격하고 이성적인 존재인 아질울포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처럼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이성의 내부가 텅빈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이 이색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는 이성적이지만 결국 종교적인 계율이라는 전통을 가진 서구의 사고방식을, 이교도와의 전쟁과 거기에 참여한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통해 거칠게 힐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무수히 많은 이름을 가진 광기의 하인 구르둘루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광기라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 네가 사랑한 이 갑옷은 지금 인간의 육체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나처럼 젊고 가벼운 육체라 하더라도 그 무게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넌 이 갑옷이 어떻게 자신의 비인간적인 순백성을 잃어버리고, 전투에 사용되는 단순한 의복,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변함 없고 유용한 도구로 변했는지 모를거다.” (p.166)

그리고 이렇게 소설이 이성과 광기 사이의 균형감을 지향한다는 점이 소설의 앞 부분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람발도에 의해 그려지고 있다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라진 기사를 대신하여 남겨진 갑옷을 입고 있는 람발도에 의해 껍데기로만 남은 이성과 규율 등이 오히려 다른 이들의 이성적인 사고를 가로막는 장애물임이 드러난다. 인간 이성의 산물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그렇게 인간을 상실했을 때, 오히려 이성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음에도 비이성을 이끌어내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지금 내가 구불구불한 작은 줄로 그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바다, 아니 대양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지금 나는 아질울포가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탄 배를,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가서 어마어마하게 큰 고래, 장식 띠를 두르고 <대양>이라는 글씨가 적힌 고래 한 마리를 그린다...” (p.135)

비록 3부작 중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좀더 철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역시 우화적인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반쪼가리 자작》에서는 자작의 조카가,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남작의 동생이 화자였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기사를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녀원의 수녀가 화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이야기의 서술자는 자신의 창작의 비의, 자신이 손으로 그려내는 것들이 곧바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비의를 간혹 내비치기도 한다.

“<떠나게 내버려두어야 해, 젊으니까, 무슨 일인가 하게 해야 해.> ... 카를로 대제는, 행동이 항상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행동하는 인간들 특유의 습관대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과거의 것들을 잃어버린 데 대한 고통을 훨씬 더 많이 느끼는 노인들의 씁쓸함이 담겨져 있었다.” (p.106)

그렇게 화자에 의해 아질울포는 자신이 구하였던 여인 소프로니아를 찾아서, 하인 구르둘루는 아질울포를 따라서, 브라다만테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질울포를 쫓아서, 람발도는 자신이 사랑하는 브라다만테를 뒤따라서, 그리고 아질울포가 구한 여인을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한 토리스몬도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이 소설에 모험 가득한 옛날 이야기류의 활기를 제공한다.

“우리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빈 갑옷 속에도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이 술병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겠지요.” (p.169)

여행을 하고 아질울포의 억울함은 벗겨지고, 오해는 풀리고, 사랑은 이루어지고, 또다른 사랑이 잉태되는 와중에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질울포는 갑옷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어쩌면 아질울포의 갑옷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많은 형이상학적인 준거틀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준거틀이 아니라 그러한 준거틀의 근거 이유가 되는 인간이고, 그렇게 아질울포는 자신의 갑옷을 벗어던짐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저 그 자체로 존재와 부재를 뛰어넘는 경지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 / 이현경 역 / 존재하지 않는 기사 (Il Cavaliere Inesistente) / 민음사 / 186쪽 / 199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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