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과 2013의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인 공지영과 김영하의 소설이 문학 혹은 문학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제 2013년, 한 걸음 나아가 올해의 수상자인 김애란은 말과 언어를 그 대상으로 삼아 그 미래를 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시각각 첨예화되고 있는 디지털 세상, 종이책의 섣부른 미래 예측을 넘어 이제 소외되고 있는 말에게 촉수가 뻗게 되었다. ‘침묵’하면 누가 뭐래도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가 떠오르는데, 그러한 침묵의 미래를 논하고자 하는 김애란은 발칙하지 아니할 수 없을 터, 어쩌면 이 관념소설을 통해 보여지는 작가의 발칙함이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의 선정 이유가 아닐까.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
하지만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김애란과는 달라 글이 쉬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서사가 절제’된 ‘관념소설’이라는 선정 이유서 안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김애란과는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해도 김애란은 김애란이어서 이 작가의 소설을 읽는 일이 정찬이나 정영문 등의 소설을 읽는 것만큼 곤혹스럽지는 않다. 말이, 그것도 특정지은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말 전체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이라는 설정이, 보통은 고속으로 읽히는 김애란의 글에 과속 방지턱처럼 작용하는 것일뿐... 현재의 말이 갖는 아슬아슬한 처지를 박물관에 갇힌 말의 소설 속 처지에 빗대고 있지만, 어쨌든 결국 ‘오해’에서 ‘이해’로 또한 어떤 ‘에너지’나 ‘자원’이나 ‘연료’로 화할 운명을 지닌 말이라는 사실로 맺음하고 있으니, 비관적인 소설은 아니다. 여하튼 이러한 말의 미래를 ‘침묵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떠안는 것은 막스 피카르트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김애란의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 지구는 한쪽으로 돌고 바람은 여러 방향에서 부는 밤이었다...” (p.58)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이런 문구를 종종 읽을 때 극대화된다. 김애란의 문장이 발휘하는 에너지가 워낙 강하니 오히려 서사를 잠식한다고나 할까. 김애란이 장편 소설보다는 단편 소설에서 더욱 발군의 능력을 보이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일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이야기를 품은 이야기여서, 문장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다.
함정임의 「기억의 고고학 - 내 멕시코 삼촌」.
빨간 아코디언을 켜며 춘아 고모의 집에 나타났던 멕시코 삼촌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억의 고고학에서 끄집어낸 소품처럼 정겨운 풍광으로 다스려가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단편 소설의 맥을 따라가고 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이평재의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이평재라는 작가가 남자인지 알았다. 소설의 시작에 앞서 실린 사진을 보니 여자이다.) 소설은 자살을 부추기는 우리 현실 사회에 대한 반어적인 은유이다. ‘그리네스’라고 불리우게 된 자살 병원체를 소재로 삼고 있는데, 역시 그 병원체를 널리 퍼뜨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고 우리 사회라는 그런 이야기...
천운영의 「엄마도 아시다시피」.
칠십오 세로 생을 마감한 노모가 있고 그 아들이 있다. 중년인 그 아들에게 노모의 부재는 어떤 슬픔으로 각인이 되는 것일까, 그러한 각인이 또 다른 가족에게는 어떠한 낙인이 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일까... 읽는동안 문득 나의 부모님을 떠올린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혹은 그들을 떠올리게 될 것인지... (너의 부모님은 지금 일본을 여행 중이시다.)
편혜영의 「밤의 마침」.
어느 날 휩쓸리게 된 작은 사건, 하지만 그 사건은 나의 신념과 가치 체계 전반에 대한 회의를 갖도록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러한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며, 그전까지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던 나는 그 순간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른다.
손홍규의 「배우가 된 노인」.
공원에서 발견한 ‘묘한 기품’을 발하는 노인... 그 노인이 공원에서 그려내는 엉뚱한 궤적... 나의 현실의 남루함과 노인의 기품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던 간극은 결국 이야기를 돌고 돌아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된다.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에 켜켜이 쌓여 있다고 믿는 간극들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재구축 하는 동안 말이다.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
세상을 떠돌며 유랑하던 하루오와 그 순간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하루오... 내가 인도를 여행 중에 만난 하루오와 면접을 보기 위해 자신의 앞에 서 있던 하루오... 하나의 하루오가 또 다른 하루오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절반 이상의 하루오로 게속해서 존재하였던 하루오의 이야기이다.
염승숙의 「습濕」.
등에 귀가 달려 있었고, 이제는 등에서 소나무를 키워야 하는 진구오의 아버지 보다는 ‘특정 개인이 온라인 사이트에 남긴 모든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딜리트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죽은 사람의 온라인 뒷수습을 해주는 비즈니스를 가지고 있는 진구오가 일하는 업체가 더 흥미롭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으로 온라인 유산 상속의 처리를 대행하는 업체를 상상하고는 했는데, 이 소설에는 그 내용이 좀더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여하튼 세상은 점점 더 축축해지고 있다.
김이설의 「흉몽」.
읽다보면 정말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망가져버린 가정을 다시금 추켜 세우기 위해 분발하던 아내와 남편이 시간이 흐른 후 포구 마을에서 만나게 되지만, (김이설은 김이설이어서) 그것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이것이 흉몽이라면 얼른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흉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