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전경린의 소설을 읽었다. 잘 읽힐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매일 삼십여 분씩 올라서 있는 헬스장의 트레드밀 위에서처럼, 가쁜 숨을 들이켜야 하는 일주일이었던 탓에, 전경린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일 뿐이야, 두려움이 문제가 아니란 두려운 데도 힘을 내지 않는 것이 문제야, 라는 혼잣말을 하느라 소설에 집중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 심장이 얇은 습자지처럼 한 겹 한 겹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p.361)
전경린은 역시 이야기보다는 문장의 작가여서 소설의 말미, 드디어 희수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유란과 마주치는 순가의 심정을 표현한, 이 한 문장은 참 날카롭기도 하다. 그러니까 소설은 의붓자매이기도 한 희수가 유란의 거처에 머물면서 유란과 연락되기를 유란이 돌아오기를 유란과 만나기를 희망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자기의 사랑을 지키는 사람과 자신의 미움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사람.” (pp.78~79)
사랑을 지키는 사람이든 미움을 지키는 사람이든, 하물며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할 것이다. 희수나 유란은 물론이려니와 명서나 조현지, 허은경, 문혜지 등도 모두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이 모두 거기서 거기이니, 오히려 시선을 끄는 것은 위의 문장 속 이야기를 한 ‘반짇고리 파는 노인’과 아래의 5,000원을 주면 무엇이든 상담을 해주는 ‘상담사 사내’이다.
“올 때마다 늘 같은 소리야. 말을 좀 더 정리해서 다시 오라니, 할 말이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정리를 하란 건가…….” (p.148)
‘반짇고리 파는 노인’은 세상의 외곽을 떠돌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에게 반짇고리를 팔고, ‘상담사 사내’는 세상의 끄트머리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담을 해준다. 상담을 원하는 사람에게 ‘말을 좀 더 정리해서’ 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독립적이면서도 약간 히피적으로 살려는 의지는 고양이를 키우며 혼자 사는 여자들이 가진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최소한만 이 땅에 살고, 최소한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36도의 체온이 정제시키는 여백 안에서 가능한 한 자유롭게 존재하고 싶어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곁에서 사는 동물들이나, 다른 대륙에 사는, 전혀 모르는 타인들과도 최소한으로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누려 한다.” (p.292)
다만 이 두 캐릭터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캐릭터들은 대동소이하거나 그저 하나의 캐릭터의 도플갱어와도 같다. 이처럼 캐릭터들이 습자지처럼 얇아 입체적이지 못하니, 소설은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작가가 수집한 에피소드들의 나열에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도 같다. 사실은 (책의 표지에서 시작하여)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 칠월도 조금 뜬금없다. 이처럼 전반적인 소설의 인물들이 유기적이지 못하다. 최소한의 소설적 구성, 최소한의 입체감을 가진 캐릭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가와 최소한으로만 소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