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해 볼 수 없는 한강의 서늘함이 물씬...
2003년에서 2012년 사이에 계간지나 월간지에 발표한 소설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십여년 사이에 씌어진 작품들인데도 그것들이 한강의 작품임을 알아차리는 데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 작업을 하는 여자, 그리고 여자들의 부부 생활 혹은 육아 생활이라는 흐릿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결혼 생활을 하는 이들이 가질 법한 조금은 우려스러운 애매함들을 향한 농후한 시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박완서의 《저물녘의 삽화들》에서 계몽적이고 훈훈한 부분들을 빼버린 어떤 지점이다.
「회복하는 인간」.
이인칭에 시간을 무시하는 형식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강 특유의 어두운 서늘함의 위력은 형식조차도 뛰어넘는 것 같다. 아린데도 맑은, 그러니까 추운 겨울날 시린 손을 계곡물에 담그면 느껴질 법한 쨍함이 그득한 한강이다. 자매의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을 역순으로 훑어간다. 오래 전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하였던 나의 모든 행동들을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더 아프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 모든 시간들을 떠올리고 글로 옮김으로써 인간은 회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훈자」.
“...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 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p.42) 한강의 이런 묘사가 좋다. 한강이 ‘가난한 스웨터’를 입은 아이라고 말하면 고스란히 그 아이가 떠오른다. 소설을 읽기에 앞서 ‘훈자’를 이상한 사람 이름쯤으로 짐작하였는데, ‘훈자’는 실은 파키스탄 북부에 있는 해발 6000미터 높이에 있는 고장이다. 부부로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것에 어딘가 서툴러 보이는 한 여자의 미지근한 독백처럼 들리는 소설이다.
「에우로파」.
‘근본적으로, 나라는 사람한테는 위대함이 결핍돼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 인아와 그 옆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 한 번의 결혼 실패로 혼자가 된 여자의 결핍,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남자의 결핍이라는 두 가지의 결핍이 서로를 위로할 때 느낄 수 있는 무엇... 목성의 두 번째 위성인 에우로파처럼 서로의 주위에서 떠다니는...
「밝아지기 전에」.
작장 동료였던 은희 언니와 나의 이야기... 우리 모두의 인생이 가지고 있는 커 보이지만 사소한, 작아 보이지만 융숭깊은 수많은 우여곡절들 모두는 문득 시작되고 느닷없이 막을 내린다.
「왼손」.
“혹시 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 때.” (p.152) 우리 모두는 그런 경험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강의 서늘함이 조금 과하여 그로트세크함으로 전이될 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통제가 되지 않는 왼손으로 인하여 파멸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 그 남자의 삶 안에 이러한 파멸의 조짐이 들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란 돌」.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런 행동 유형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옛 친구에게 갑자기 연락한다. 옛 은사를 찾는다. 성직자를 만난다. 갑자기 성격이 밝아진 것처럼 보인다... 자살을 앞둔 사람들의 공통적인 행동들이니 주의 깊게 관찰하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p.194) 아이가 있고 남편이 있고 그림을 그리는 나, 그리고 나의 학창시절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던 친구의 삼촌의 이야기... 우리의 생에서 피가 솟구치는 어떤 시기들은 모두 은밀한 내막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그 내막을 들춰볼 때 죽음으로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노랑무늬영원」.
표제작이다. ‘노랑무늬영원’이라는 말을 저자가 만들었나 하였는데, 도마뱀의 일종을 의미하는 학명이란다. 노랑무늬영원, 불도마뱀, Fire Slalmander... 손을 다치고, 남편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자신이 하던 작업조차 희미해져버린 한 여인이 그만큼이나 희미해진 옛 기억 속의 사진 한 장을 길어올리게 된다는 이야기...
한강 / 노랑무늬영원 / 문학과지성사 / 309쪽 / 2012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