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비행운》

행운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불행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by 우주에부는바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가공할만한 문장력을 선보이는 김애란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소설집의 제목은 ‘비행운’인데, 포함된 단편소설들의 제목들 중 하나를 표제로 삼는 관행에서 벗어나 있다. 실려 있는 소설 <하루의 축>에 한 번 비행운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아주 잠시 스쳐 지날 뿐이다. 오히려 비행운은 소설집 뒤에 실린 우찬제의 해설에서 길게 설명된다. 그러니까 우찬제에 따르면 비행운 飛行雲 에 대한 동경이 사라진 이 시대에는 그만큼 비행운 非幸運 의 악순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김애란의 이번 소설집에서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한때 마음에 들었던 선배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나는 갈등한다. 눈에 띄게 살이 쪄버린 나는 선배를 만나도 되는 것일까. 게다가 나는 어린 시절이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선배를 만나러 가게 되지만, 선배가 필요로 하였던 것은 뚱뚱해져버린 내 몸과 왕성해진 식욕이었다. “...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p.44) 선배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했던 관심은 사라지고 잊고 있었지만 내게로 향하였던 관심은 남았다. 어쨌든 나는 울었고, 독자인 나는 그것을 희망적으로 읽는다.

「벌레들」.

허물어져가는 재개발 A 구역 바로 옆 장미빌라에 둥지를 튼 신혼부부... 나는 그곳에서 임신을 하였고, 남편의 회사 사정은 점점 나빠지기만 하며, 벌레는 시시때때로 출몰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저녁 떨어뜨린 상자를 찾기 위하여 A 구역에 들어가 쓰러진 나무의 뿌리 부분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 엄청난 양의 곤충이, 벌레가, 유충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길게 줄 이은 벌레들의 행렬을 갈래를 뻗어 재앙처럼, 혹은 난민처럼 도시로 - 도시로 - 퍼져 나가고 있었다...” (p.78) 허물어져가는 도시의 한 구역과 바로 그 근처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나, 하지만 그러한 나의 출산이 순조로울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

「물속 골리앗」.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p.85) 김애란의 문장이 주는 즐거움의 액기스를 느낄 수 있는 첫 단락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죽은 아버지, 쉬지 않고 내리는 비, 그리고 맥을 놓아 버린 어머니, 그러고도 멈추지 않는 비... 고공 크레인에서 원인 불명의 사고로 아비는 죽었지만, 이제 물 속에 잠겨버린 세상에서 그녀가 의탁할 수 있는 곳은 삐죽 솟아오른 크레인들 뿐이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가족들 중 한 명씩 끼어 있는 망나니 용대, 그가 어머님의 집조차 잃도록 만들고 도착한 서울에서 만난 조선족 여인 임명화... 하지만 그러한 명화는 암에 걸리고, 용대는 명화를 위하여 가족들에게 손을 벌려보지만 실패할 뿐이며, 결국 명화는 죽는다. 그리고 이제 시간은 흘러 나는 명화가 살아 있을 때 중국어를 배우겠다는 용대에게 녹음해준 테이프 속의 목소리를 들으며 택시 운전을 한다.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여기서 멉니까?’ 라는 테이프 속의 문장이 애처롭다.

「하루의 축」.

공항에서 청소일을 하는 기옥 씨와 감옥에 갇힌 기옥 씨의 아들 영웅... 추석이라는 명절을 기점으로 하여, 공항 청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비루하기 그지 없는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풍광은 공항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풍광, 그러니까 연휴를 맞아 흥미진진한 표정과 매혹적인 욕망을 안고 여행을 떠나는 풍광과 자꾸 중첩된다.

「큐티클」.

네일 아트를 받고, 친구의 결혼식에 들르고, 그곳에서 우연이 부케를 받고, 받은 부케를 들고 서울 시내를 헤매이다, 신용카드를 만들고 여행 가방을 받아, 그 가방에 부케를 넣고, 가방을 끈 채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 친구와 함께 하기로 했던 태국 여행은 포기한다. 말끔하게 그려지는 티비 속 도시 여성이 아니라 그러한 티비 속 도시 여성이 되기 위하여 벌여야만 하는 도시 여성의 신산한 행적을 살펴보았다고 해야 할까.

「호텔 니약 따」.

전편의 두 친구가 포기하려고 했던 여행이 우여곡절을 겪어 성사되었다고 해야 할까... 대학 동기 은지와 서윤이 떠난 동남아 여행기이지만 그것이 꽤나 내면적이다. 호텔 니약 따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크게 존재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여성이 서로를 향해 들이미는 우정은 사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애정의 한 취향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는 어느 순간 서로를 할퀴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서른」.

다단계에 빠졌던 서른의 한 여인이 독서실에서 어려운 한 때를 공유하였던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황된 욕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런저런 살아볼 요량을 하다가 발을 디디게 된, 혹은 누군가의 섣부른 유혹에 굴복하여 헛디디게 된, 다단계의 실상은 그러니까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파는 것이었다는 현실이 참혹하다.


김애란 / 비행운 / 문학과지성사 / 350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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