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터키 작가이자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작가의 소설들 중 《내 이름은 빨강》과 《순수 박물관》두 권을 읽었고, 그 두 권의 소설만으로도 이 작가가 품고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작가가 바로 자신을 키워낸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향하여 입의 포문을 열었으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콘래드, 나보코프, 나이폴처럼 언어, 국민, 문화, 나라, 대륙, 더욱이 문명을 성공적으로 바꾸면서 글을 쓴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창조적 정체성을 유배 혹은 이주에서 얻었던 것처럼, 내가 항상 같은 집, 거리, 풍경 그리고 도시에 매여 사는 것이 나를 나타내는 것을 알고 있다. 이스탄불에 대한 이 예속감은, 도시의 운명도 사람의 성격이 된다는 의미이다.” (pp.19~20)
일종의 자서전인 책은 오르한 파묵의 어린 시절에서 대학에 입학 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크게 재산을 모은 할아버지 덕에 신흥 부잣집에서 태어난 작가는 대가족 아래에서의 성장기를 적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대에 이르러 잦은 사업 실패로 벌어진 가족들의 관계,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한 부모 관계의 악화,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 만난 아가씨와의 로맨스의 실패, 그리고 건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스스로 다니기를 거부하였던 대학 시절까지의 (작가는 스물 세 살에에 자퇴한 이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아파트에 틀어박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야기가 펼쳐진다.
“... 나는 몇 시간이나 계속했던 이 산책을 하면서,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도시의 진열장, 식당, 반쯤 희미한 찻집, 다리, 극장 앞, 광고, 글자, 오물, 진흙, 인도에 있는 어두운 물엉덩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네온 가로등, 자동차 불빛, 떼를 지어 쓰레기통을 뒤엎는 개들을 보았고, 가장 한적한 마을의 가장 좁고 침울한 거리에 있을 때면 집으로 뛰어가 도시의 이 모습, 이 어두운 영혼, 이 혼란스럽고 신비롭고 지친 상태를 설명하는 무엇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pp.489~490)
하지만 이 산문집의 주인공은 오르한 파묵이면서 동시에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이다. 작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바라보았던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고자 함이 아니라, 바로 그 어린 시절에 바라보았던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다시 한 번 끌어내고자 함에 가깝다. 그리고 작가에게 있어 이 도시 이스탄불은 ‘비애’라는 단어로 축약된다.
“... 나는 나의 고민을 전적으로, 성숙하게 인식하고, 이것과 직면하고,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거나 최소한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는 대신, 내 이성의 초점을 변환하고, 나를 기만하고 잊는 놀이들을 함으로써 이를 숨겨진 감정으로 만들었다... 이 감정은 내 머릿속에있는 두 번째 세계, 그리고 죄책감과 합치되곤 했다. 이 복잡한 상태를 비애라고 하자...” (p.128)
그러고보니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정서가 바로 이 ‘비애’가 아니었나 싶다. 분명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는 슬픔이 담겨져 있다. 그 슬픔이 크니, 눈을 다른 곳으로돌려서 피해버릴 수도 있으련만, 작가는 그렇게 하는 대신 오히려 그 슬픔을 직시하는 사랑을 택하는 것이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속 행위가 그러했다면, 산문에서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두 개로 분리함으로써 ‘비애’의 감정을 토로한다.
“... 나를 서양인의 시각의 주체와 객체로 만들고, 도시 안에서 보는 것과 도시 밖에서 보는 것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나의 주저 역시, 거리를 무심히 걸을 때 느꼈던 것처럼, 도시에 관해 변하기 숩고 다양하며 서로 상반되는 사고들을 생산하는 원인이 된다. 나는 나를 이곳 사람으로도 이방인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p.393)
작가는 분명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픈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는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어두운 면을 모른 척 하지 않는다. 대신 그러한 어두운 면이 외국의 작가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를 신경 쓴다. 혹시 이스탄불에 속한 자기 자신이 이스탄불을 주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외국인 작가들의 글에 나타난 시선을 통하여 자신의 시각에 객관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저녁에 길을 걸을 때나 창밖을 볼 때, 오렌지색 불빛이 감도는 집안을 창을 통해 주시하는 것을 나는 여전히 좋아한다... 작고 소박한 어떤 1층 집에서, 우리 집처럼 오렌지색 불빛 아래서, 모두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는 가족을 보면, 그저 그 모습만으로 그들이 행복하다는 순진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그 외관뿐 아니라 도시에 있는 집 내부와 그 실내 풍경이라는 것을 외국인 여행자들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p.377)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한 애정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외국인 작가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기 이전, ‘회고록 작가 압둘학 쉬나시 히사르’, ‘이사르에 관해 책을 쓴 친구인 시인 야흐야 케말’, ‘케말의 학생이었다가 후에 친구가 된 소설가 아흐메드 함디 탄프나르’, ‘기자이자 역사가인 레샤트 에크렘 코추’ 등 이스탄불의 작가들을 통하여 이스탄불을 향한 자신의 확고한 시선을 갖기 위한 노력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 이스탄불의 실내 풍경을 잘 아는 작가이다.
오르한 파묵 / 이난아 역 /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Istanbul) / 민음사 / 516쪽 / 2008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