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 《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근미래 SF의 외피를 두르고 악마론의 내피를 견지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11년을 일하면 1년의 휴식이 주어지는 킬러인 나는 체코의 한 도시에서 휴가를 취하는 중이다. 그 기간 동안은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조직으로부터 호출이 오지 않는다. 나는 그 휴가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무기를 잡을 것인지 아니면 무기와 함께 목숨마저도 내려 놓아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조직으로부터 누군가가 찾아오고, 나는 <랑페의 결백>이라는 연극을 보게 된다.


“객석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관객이 아니라 연기자였다. 누군가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는 사람.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늘 의식해야 하는 사람. 나에게는 객석에 마련된 내 자리조차 객석이 아닌 무대로 느껴졌다. 그러니 저 앞에 있는 무대는 무대 속의 무대인 셈이었다. 저기로 숨으면 세상으로부터 두 번이나 달아나는 게된다는 의미였다.” (p.20)


어쩌면 너무 앞서서 이야기의 핵심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거나 아니면 독자에게 좀더 친절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미래 SF의 형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미스터리한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의 자태도 가지고 있는 소설에서 ‘은닉’은 (제목도 바로 은닉이지 않은가) 그만큼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시 보니 은닉, 이라는 제목 뒤에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숨기려 한다고 숨길 수 없는 무엇이라면 아예 힌트를 앞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고 보아야 하나.


여하튼 나는 그 연극의 무대에 서 있는 다섯 명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침대에 죽어 있는 한 명의 인물 혹은 피사체를 보고 놀란다. 그녀는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학창시절의 동기이자, 권력의 핵심인물이자 얼마전 목숨을 잃은 장무권의 배다른 딸인 김은경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휴가를 멈춘 채 어떠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되는 김은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기로 작정한다. 여기에 김은경과 함께 학창시절의 동기였고 내가 속한 검은 조직에서 브레인 역할을 하였으며 죽은 것으로 알려진 조은수가 가세한다.


돌아가는 대략의 이야기는 이렇다. 장무권은 죽었지만 장무권에 의해 만들어진 ‘전략무기개발네트워크’는 미지의 위험인자가 되어 남아 있다. 장무권을 없앤 연방에서는 그러한 위험스러운 조직의 후계자로 김은경이 낙점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조직의 책임자격인 최창수를 나와 접선시킨 것이다. 나는 김은경을 위하여 연방을 배신할 작정을 한 것이고, (한때는 나와 파트너였던 그러나) 이미 연방으로부터 제거의 대상이 되었던 조은수는 이렇게 나와 다시 손을 잡게 된 것이다.


“... 이식형 콘택트렌즈는 악마라는 이름의 새 인격체와, 인간의 의식만으로는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인간 내부의 무한한 우주와, 인간의 경계 바깥에 놓인 세상을 떠돌던 수많은 정보들을 집적해놓은 거의 우주만큼 방대한 정보종합체계를, 하나의 신경조직망 안에 재배열하고 있었다...” (p.243)


하지만 이러한 줄거리들은 결국 ‘악마’에 대해 말하기 위한 장치들일 뿐이다. ‘디코이’, ‘인세트 플라이트’, ‘초초소형 비행체’ 등의 여러 장치들 또한 모두 결국은 눈에 콘택트렌즈처럼 끼면 신경과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작동하게 되는 ‘악마’라는 조종장치를 위한 사족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근미래 SF의 외피를 두른 소설은 결국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를 탐구하는 일종의 ‘악마론’의 내피를 단단히 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아주 충분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 자체에 대해서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경외를 보낸다) ‘악마’를 도발하는 테크니컬한 장치와 그 작동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만 (스포일러이겠지만 마치 <매트릭스>의 텍스트 버전을 보는 듯하다), ‘악마’를 깨우는 기폭제가 되고 있는 ‘김은경’이라는 존재는 미약해 보이고, 마지막 즈음의 반전 또한 의외성이 부족해 보인다. 세련되어 눈을 현혹시키기 충분한 옷 속에서 의외로 앙상한 몸을 발견하여 살짝 실망스러웠다고나...



배명훈 / 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 북하우스 / 302쪽 / 2012 (2012)



ps. 단편 <크레인 크레인>, 장편 <신의 궤도>에 이어 이번 소설 <은닉>에도 김은경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작가의 첫사랑 이름이라도 되는 것일까... 거대한 크레인과 비행기를 조종하였던 김은경은 이번에는 죽음을 연기하는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 하지만 모든 사건의 근원인 피사체로 등장하는데, 여하튼 어떤 사랑의 대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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