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 감독 <멜랑콜리아>

태양의 뒤편에 도사리고 있던 멜랑콜리아의 위력...

by 우주에부는바람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허튼 상념이 많지만 우울한 편은 아니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미래 따위 개나 줘버려’의 청춘을 살았으니 이따위 현재에 도달한 것이지, 라며 자포자기하는 대신 인과응보의 현실을 ‘납득’하는 것을 보면 (우울해하지 않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물론 과거 한 때는 꽤 극단적이기도 하였다. 수면 유도제를 먹고 15층 아파트 옥상에 오른 적도 있으며, 손목에 자해의 상처가 있는 현재의 아내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나는 부족하거나 넘치는 성미가 되지 못하였고, 그러니 폭발하거나 응축하지도 못하였다. 태양 너머에서 서서히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멜랑콜리아 행성과 같은 멜랑콜리아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문청의 열기로 들썩이던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멜랑콜리아는,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실체가 있는 행성이 아니라 태양계 바깥의 어디쯤에 존재하는 실체가 불분명한 행성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는 지구라는 행성의 파괴라는 재난, 그 재난의 순간에 대한 호기심을 오랜 시간 간직해왔다. (재난 영화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재난 영화의 경우 결국 주인공 혹은 지구는 그 재난으로 고생하고 피폐해지기는 할지언정 재난의 온전한 종착지라 할 수 있는 죽음 혹은 절멸로부터는 비껴감으로써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구가 정말 어떤 외계 행성과 부딪치게 되는 순간에 대한 것인데, 바로 그러한 순간 우리는 그 순간을 지구라는 행성을 기준으로 삼은 시간으로 계산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에서 통용되는 범용적인 우주의 시간으로 계산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엉뚱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호기심은 최초로 지구와 외계 행성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순간부터 (지구를 기준으로) 나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계산해야 할 것이냐는 것이다. 지구 충돌까지 세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정말 한 치의 에누리도 없는 세 시간인 것인지, 아니면 충돌과 관련하여 최초로 영향을 받게 되는 어디 남태평양의 어떤 섬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도 의심스럽고, 세 시간이라고 치더라도 그 세 시간이 되는 순간에 내가 곧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면 외계 행성과의 충돌 이후 내가 죽기까지 버틸 수 있는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계산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계산되고 나서야 이후 나의 지침과 같은 것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나 할까.



그런 내게 있어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는 나의 호기심을 해소시켜주는,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선구적인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는 아예 지구와 다른 행성의 충돌의 순간을 아예 영화의 도입부에 배치한다. 감독은 이를 숨기지 않으며 느리게 더 느리게 여러 장의 스틸 사진을 차례로 플레이시키는 것처럼 느리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 느림은 영화의 마지막 절멸의 장면이 보여주는 순식간과 대조적이어서 더욱 극적이다.


영화는 저스틴과 클레어라는 두 자매의 이야기이며, 그래서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스틴의 챕터는 행복한 두 사람 저스틴과 예비 신랑의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그 결혼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내재된 우울증을 폭발시키는 저스틴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결혼식은 그렇게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가 가지고 있던 흠결들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끝이 날 뿐이다. 그러니 영화 속의 결혼식은 생성이 아니라 파멸을 알리는 암시로 작용한다.



그 후 이어지는 클레어의 챕터에서는 본격적으로 멜랑콜리아 행성이 드러난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워진 저스틴은 클레어의 집으로 오게 되고, 그곳에는 지구에 접근하는 행성 멜랑콜리아에 집착하는 클레어의 불안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천문학자인 남편은 클레어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느 밤 클레어는 저스틴이 숲에서 나체인 채로 행성과 대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사악한 것으로 가득한 지구는 사라지는 것이 옳다는 저스틴 그리고 아들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다.


그렇게 지구가 외계 행성의 충돌을 보여주는 도입부에서 마지막 절멸의 순간까지, 그러니까 내가 알고자 한 바, 실제로 지구와 어떤 행성이 충돌하였을 때 내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어쨌든 지구의 시간이자 영화의 진행 시간으로 따져 보자면 두 시간쯤이다. 어쩌면 지구가 외계 행성과 충돌을 했음을 알리는 사이렌이 길게 울리는 순간 내게는 영화 한 편을 관람할 시간 정도가 주어지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때 내가 선택할 영화가 <멜랑콜리아>는 아니다. 나는 사실 그렇게 우울한 편이 아니다.



멜랑콜리아 (Melancholia) / 라스 폰 트리에 감독 / 커스틴 던스트, 샤를로뜨 갱스부르, 키퍼 서들랜드 출연 / 136분 / 201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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