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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암보스 문도스》

조금 과감하고 보다 순수한, 가면 속의 결정이 가능한 양쪽의 세계로의 여

by 우주에부는바람

“인간은 왜 가면에 열광할까? 아마도 그것은 가면이 인간에게 내적인 자유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 공과 사, 안과 겉이라고 하는 양쪽의 세계에서 뭔가를 늘 선택하게 되어 있는 인간은 가면을 쓰는 순간 오히려 과감해진다. 도덕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 순간 인간은 악을 택하게끔 되어 있다. 물론 배트맨처럼 가면을 쓰고 선을 행하는 예외도 있으나, 선의 가면조차 ‘숨기는 행위’ 자체의 찜찜함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p.224)


우리는 때때로 가면을 동경한다. 무수한 이분법적 선택의 순간에 놓일 때, 우리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처하게 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한데, 가면이 그 리스크를 줄여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가면을 쓴 후의 선택은 조금 과감하지만 보다 순수한 결정일 수 있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찜찜’ 하지만 그것은 가면의 탓이 아니라 가면을 쓴 우리의 탓이다.


소설가 권리의 이번 산문집은 분명 여행기이지만 본인은 그렇게 규정되기를 원하지 않는 듯하다. 서점의 직원들이 헷갈려 하길 원하는데, (일단 책 속에 여행지와 관련한 사진을 한 장도 싣지 않는 전략은 책의 판매에는 마이너스였겠으나, 작가가 원한 서점 직원 헷갈리게 하기에는 성공적인 전략이었으리라 본다) 어느 정도는 성공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일단 제목부터 추상적이다.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는 스페인어로 ‘양쪽의 세계’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제목으로는 여행기를 원하는 독자에게 어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암보스 문도스’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 헤밍웨이가 쿠바에 머물면서 글을 쓴 호텔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 어쩌면 내가 쏟아낸 무수한 어구들은 사실 내 선배들이 토해낸 말들의 무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p.30)


작가는 또한 여행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의 문학적 취향 혹은 문학적 지향으로 볼 수 있는 선배 작가를 거론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작가가 노골적으로 애정을 보이는 것이 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이며, 그래서 이 헷갈리는 여행기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이다.


“나에게 있어 누군가를 완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헤픈 여자처럼 여러 남편들을 오가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결국 지독한 고통 속에 홀로 남을 것이다. 슬픔이 치즈처럼 녹아 있는 외로운 빵 안에서 말이다. 고독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야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 세계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저 세계를 꿈꾸는 것만이 나의 몽상가적 의무이다.” (pp.36~37)


이와 동시에 자신의 문학론을 ‘남편론’이라는 명칭으로 보다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문학적 취향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의 취향으로 온전히 기울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헤픈 여자’와 ‘여러 남편’이라는 노골적인 말로 피력한 것이다. 그러니 ‘암보스 문도스’라는 책 제목은 이분법적인 선택으로부터 벗어나, 양쪽의 세계 (그러니까 어느 한 쪽의 남편이 아니라...) 모두를 포함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문학론을 함축한 단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작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여러 상황들이 끊임없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소요하니, 이를 여행기가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겠다. 서른 살 여성의 몸으로 부딪치는 세상은 때로 난감하지만, 동양의 젊은 여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끊임없이 노트에 메모를 하는 몽상가는 그 난감함들을 지긋이 담은 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작가는 쓰는 일만 남은 것이다.



권리 / 암보스 문도스 : 양쪽의 세계 / 소담출판사 / 263쪽 / 2011 (2011)



ps. 책은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챕터의 제목이 모두 소요이다. 물론 그 소유들데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 챕터의 소요 小搖 : 《유예지》의 거문고 악보에 전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 농현弄絃(국악에서 현악기를 연주할 때에, 왼손으로 줄을 짚고 흔들어서 여러 가지 꾸밈음을 냄. 또는 그런 기법.)을 짧게 하라는 말이다.

두 번째 챕터의 소요 騷擾 : 여럿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남. 또는 그런 술렁거림과 소란.

세 번째 챕터의 소요 逍遙 :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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