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호기심을 부추기고 또 해결해주는 친절함...
‘환상’과 ‘공상’ 이라는 키워드를 마음껏 편애하고 있는 보르헤스의 선집 <바벨의 도서관>을 읽고 있는 중이다. 조화를 중시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으니, 라고 하면 조금 오버이고, 어쨌든 환상이나 공상의 대척점에 있다 할 수 있는 ‘과학’에 한 발을 걸치면 균형 감각을 찾을 수 있겠다 싶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각종 환상과 공상이 더 나아가 망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금은 현실에 발 붙이겠다는 갸륵한 희석의 의지가 포함된 책 선정이었다고나 할까...
“농부는 채소 마누라(재배하는 식물 여성)가 다 자라자 뿌리에서 잘라내 집 안으로 들여온 뒤,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묶어놓는다. 그리고 성욕의 대상과 화풀이 대상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남자가 아무리 괴롭혀도 채소일 뿐인 그녀는 물이 흐르는 듯한 졸졸거리는 소리로 울기만 할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남자의 집착과 폭력은 점점 더 심해지고, 드디어 술에 취한 채 채소 마누라를 때리고 목을 조르던 농부는 결국 그녀의 줄기에 휘감겨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제 그녀는 농부의 시체를 양분 삼아 여느 때처럼 햇볕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졸졸거리는 목소리로 새들을 부르며 살아간다.”(pp.62~63)
하지만 이 선정이 아주 잘 된 것 같지는 않다. 젊은 생물학자이면서 동시에 인터넷 생물학 카페 운영자이기도 한 저자는 과학을 설명하는 일종의 도화선으로 각종 텍스트를 활용한다. 그러니까 위에 소개된 팻 머피의 SF물을 활용하고는 하는데, 이를 읽다보면 나는 다시금 ‘공상’의 자리로 훌쩍 건너 뛰게 되는 셈이다.
“생명이란 반드시 남성과 여성이 결합해야 생겨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새로운 미래와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 과학적 사실과 상상력이 결합했을 때, 인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다...”(p.85)
물론 이외에도 책은 각종 동화와 영화, 그리고 자신의 일상 등을 각종 과학적 현상을 소개하는 매개체로 적극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책의 내용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만드는데, 『과학 읽어주는 여자』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분야, 그림과 오페라와 신화와 철학 등에 대한 대중 시리즈물의 하나라는 점에서 볼 때 유효하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아침에 잠에서 깨 눈을 뜨면, 우리 몸은 마치 컴퓨터를 부팅할 때와 똑같은 연쇄적 각성 작용이 시작된다. 잠에서 깨 눈을 뜨면, 눈으로 빛이 들어오고, 망막이 이 빛을 감지한 다음 전기화학적 신호로 변환시켜서 시신경을 타고 SCN(사상하부교차핵)으로 신호를 전달한다. SCN에 존재하는 감지 세포들은 이 신호를 인식하여 뇌의 송과선이라는 부위에 영향을 미치고, 여기서 분비되는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이용하여 생체시계를 조절한다... 멜라토닌은 대표적인 수면 호르몬으로서, 멜라토닌이 많이 분비되면 잠이 쏟아지고 적게 분비되면 잠에서 깨어난다. 멜라토닌은 SCN에서 감지된 빛에 따라 양이 조절되는데, 빛이 적어지면 많이 나오고 하루 중 새벽 2시쯤에 가장 많이 분비된다...” (p.265)
더불어 저자는 꽤 친절하기도 하다. 물론 과학 용어나 과학 현상에 문외한인 독자에게 낯선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오지만 최선을 다하여 쉽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사실 오히려 이로 인해 잘 써진 블로그 글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이나 현실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종종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파란장미. 이루이질 수 없는 것,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뜻하는 대명사처럼 쓰이는 말이다... 온갖 색과 모양의 꽃이 개발되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장미의 종은 1만 5,000여 종이나 된다. 하지만 파란 장미만은 아직도 피워내질 못했다...” (p.161)
위와 같은 문장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왜 파란 장미는 불가능한 것이지? 하는 호기심에 자연스럽게 뒷장을 펼칠 수밖에 없는 식이다. (어째서 파란 장미가 불가능한지는 책을 살펴보시라, 물론 이러한 불가능함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 과학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과학의 발전을 쌍수를 들어 반기는 축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적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내용 보다는 아래의 이런 내용에 눈이 더 간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같은 퇴행성 뇌질환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평균 수명이 짧은 시대에는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 못한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릴 만큼 오래 사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p.282)
실은 절대적인 풍요의 시대에 오히려 상대적인 빈곤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처럼, 무한한 거승로 보이는 과학 발전이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피곤해 하는 편이다. 어느 정도 그 호기심의 여지가 남아 있을 때 우리의 행복의 여지도 커지는 것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니 다시금 나는 이 발가벗겨진 과학 읽어주는 여자를 떠나서 죽은 후에도 환상을 배포 중인 보르헤스에게로 가야겠다.
이은희 / 과학 읽어주는 여자 / 명진출판 / 310쪽 / 2003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