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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어쨌든 살아간다, 당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여행 안에서...

by 우주에부는바람

2005년 출간된 <끌림>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는 이병률의 여행산문집이다. 책의 제목을 보자 곧바로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무덤>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첫 구절이 떠올랐다. 어느 해 무덥던 여름, 테헤란로 빌딩숲의 번잡스러움이 일순 사라진 휴일, 우두커니 사무실에 앉아서 절망하다가, 열어 놓은 두 뼘 크기의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을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그 마음을 수습하기 위하여 계속 읊조렸던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폴 발레리의 시에서부터 불어온 것이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이전의 산문집 <끌림>에 비하여 이번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그 제목에서부터) 더욱 직접적으로 ‘당신’을 향한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 ‘당신’은 저자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일 수도 있으며, 이 모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안길 수 있는 누구가일 수도 있다. 이병률은 이 모든 ‘당신’들에게 매혹당하였다고 실토하고, 그러한 매혹당함을 위하여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부언한다.


“... 인간의 모든 여행은 사랑을 여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 안에서 여행하게 되어 있다. 사랑을 떠났다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많은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상황에 직면하여 많은 에피소드들을 재산으로 가진 저자답게 산문집 안에서는 무수한 도시와 사람과 상황과 기색을, 기쁨과 슬픔과 이별과 기척을 만날 수 있다. 때로는 시적인 언어가 되어 빼꼼 얼굴만 들이밀어 그 전체를 상상으로 여며야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직접적인 언술이 되어 몸뚱이 전체를 들이밀어 고스란히 웃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시장에 앉아서 건포도를 팔고 있는 아저씨 몰래 사진 찍다가 결국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난 웃으며 자리를 떠나려는데 아저씨가 인상을 쓰며 이리 오란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 가까이 갔는데 내 양손을 펴서 모으라고 하더니(자로 내 손바닥을 때릴 줄 알았다) 두 손 가득 건포도를 얹어주었다.”


책의 어느 쪽을 펴든 기척과 기색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이 책에는 페이지도 없고 챕터도 나뉘어 있지 않다. 언제든 어디로든 훌쩍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시인의, 목표가 없는 여행처럼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려는 분들에게 팁을 드리자면, 홀짝홀짝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읽으면 더욱 좋을 지도 모른다. 맨 정신에는 보이지 않던 색, 나의 색이거나 책 속 마음의 색일 수도 있는 어떤 색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 혼자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다른 색깔에 물들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 상태처럼 평화로운 시간도 없다. 인간적이고 싶을 때 술을 찾는 솔직한 상태. 단언컨대 술은 마음에 몸에 색을 밀어올린다.”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무덤>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라고 말하였다. 그 해 여름 난 한 줄기 바람 덕에 살아갈 작정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여름, 한창 장맛비와 그에 어울리는 바람 불어오고 있지만 내게까지 전달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쨌든 살아가는 중이다. 폴 발레리보다 한 술 더 떠 시인이자 평론가인 남진우는 자신의 시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향하는 사랑이라는 여행 안에서...



이병률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달 / 300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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