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앙하며 폭발하는 대신 태연하게 불발하는...
격앙되거나 고양되는 감정을 물리치며 감퇴하거나 ‘태연’하게 물러서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다. 혹은 홍상수의 영화들이 가지는 일관되지만 단조로와 보이기도 하는 기조인 낯 두꺼운 지식인의 두꺼운 낯 벗기기를, 은희경은 소설을 통하여 화려하고 무거운 갑옷 두른 소설가의 갑옷 벗긴 맨살 바라보기라는 기조로 뒤바꿔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류에게는 자기 이름의 연원에 대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각기 다른 설명이 두 개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비행기와 오페라. 하나가 막막한 허공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회색 두랄루민 날개였다면 다른 하나는 죽음을 부르는 눈물 젖은 오페라 아리아였다...” (p.11)
이야기는 류의 서사로부터 시작된다. 이미 사귀는 남자가 있었던 여자가 공중전화에서 그 남자에게 전화 거는 모습을 보고 반해버린 또 다른 남자, 그 남자가 바로 류의 아버지이다. 결혼 후 유학을 떠난 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류가 태어났고, 두 사람은 아주 잠깐 ‘사랑의 서정시대’를 보낸 이후에는 그저 같이 살았을 뿐이고, 또 그러한 같이 삶처럼 무연하게 헤어졌다.
“에피소드에는 속편이 없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회성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이런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작가는 최대한 에피소드를 배제한다.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플롯의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작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세계, 그 세계를 구현하지 않는 에피소드는 여지없이 퇴출된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권능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에피소드는 뇌관이 제거된 지뢰와 같다고 말해진다. 그것들 대부분은 등장인물의 인생에서 영원히 폭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가장 하찮은 지뢰 하나가 터져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p.103)
소설을 읽으면서 경박하지 않은 수다스러움으로 채워진 에피소드들은 가득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장편소설이 가져야 할) 총체적으로 도모되는 진중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작가 스스로도 그것에 부담을 가졌던 것은 아닌지 위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인과 관계가 부족할 수 있는 우연으로서의)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설령 이야기의 완성도는 떨어뜨릴 지언정,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서 그러한 에피소드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는 역으로 이러한 에피소드들이 바로 리얼리즘의 구현에 도움이 되는 장치일 수도 있다는 역설이라고나 할까...
“착하고 바른 소설만 쓰는 작가는 나쁜 놈일 확률이 높아. 그토록 세상이 너그럽고 따뜻한 곳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이유가 뭘 것 같아?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야. 세상을 착하게 만들어놓아야 제가 용서를 받고 계속 나쁜 짓을 할 수 있잖아... 나쁜 놈이 아닌데도 착한 소설을 줄창 써댄다고? 그건 권위에 주눅 든 소심한 인간이거나 그 권위에 아부해서 출세하려는 놈이야. 그런 놈들한테 뭘 기대해...” (p.152)
게다가 소설 속 중요한 등장인물인 요셉의 행태와 그러한 요셉의 반대편에 있는 이안이 만들려고 하는 <위기의 작가들>이라는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금세 홍상수가 떠오르는데, 은희경이 소설 속에서 추구하는 에피소드의 리얼리즘이야말로 홍상수가 그의 영화에서 구현하는 리얼리즘과 닮아 있지 않나 싶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에서 소설가로 등장하는 요셉의 모습은, 홍상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스스로에게 심취되어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닮아 있다. 요셉이 내뱉는 위와 같은 위악의 진술이 그러한 캐릭터를 더욱 정형화 시키고 있다.
“... 요셉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의 고유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고유함이 없다면 인간은 시간이 되면 꺼지는 기계처럼 패턴에 의해 소비될 뿐이다. 패턴에는 매혹이 없었다. 타인이 지겨운 것은 관계를 맺기 위해 그런 패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환멸에는 그나마 고독이 위로가 되었다. 환멸을 완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증이었다...”
소설 속에는 류와 류의 부모, 류와 요셉, 요셉과 이안, 요셉과 도경, 요셉과 이채 등 여러 인물들의 관계가 나열되어 있다. 이 중 소설의 진행을 위해 양적으로 많이 다뤄지는 것은 주로 요셉과 이안의 관계이며, 류와 요셉의 관계는 오히려 질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대신 양적인 비중은 적다. 둘이 함께 하면 고통이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혼자이게 되면 고독이다, 는 뉘앙스는 바로 류와 요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이러한 고통과 고독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들을 직시하자는 것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류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전체적으로 조금 기형적이다. 소설의 서두에 드러나는 류의 서사 이후 사라진 류는 (그리고 류라는 이름은 왠지 남성적이지 않나?) 아주 드물게 그리고 우연적으로 등장할 뿐이고, 소설 후반부의 등장 씬도 조금 맥이 빠진다. 한껏 부풀려진 긴장감은 폭발하지도, 그렇다고 폭발하지 않아 더욱 큰 긴장감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순간 멈출 뿐이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에피소드는 뇌관이 제거된 지뢰’라고 작가가 스스로 말했던가. 배제되어야 할 에피소드가 너무 전면에 나선 탓일 수도 있겟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평가조차 소설 안에서 따온 것이니, 이 작가의 이러한 솔직함은 (이조차 홍상수를 닮아 있다) 인정할 수밖에...
은희경 / 태연한 인생 / 창비 / 268쪽 / 2012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