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천 《나의 토익 만점 수기》

계량화된 평가 시스템에 대한 맹신과 학력 인플레가 만연한 우리 사회가 부

by 우주에부는바람

토익 만점이라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를 가진 나의 호주 여행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처음 소설을 보고 제목 참 얄궃다, 라고 생각을 한 것이 실은 나는 이 땅에서 나고 자라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단 한 차례도 토익 시험을 (물론 토플 시험도) 친 적이 없는 탓이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수업시간에 적당이 들어가 주고 시험시간에는 책상에 앉아 있는 성의만 보여도 F는 면할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 중에는 혹 나와 같은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토플은 한 물 가고 토익의 시대가 되었고 졸업을 하기 전에 만점에 가까운 토익 점수를 따놓지 않으면 무지막지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기류가 팽배하니, 990점 만점에 590점의 점수를 가진 주인공이 토익 만점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굳은 결심과 함께 호주로 떠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목표가 그렇듯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또 인생이다.


“... 5개월이다 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난생처음 인질이 되었고, 농장 매니저로 초고속 승진했으며 바나나를 따는 한편, 토익을 탐구했다...”


그리하여 호주까지 간 주인공을 기다리는 것은 캐첩통을 이용해 마리화나를 피우며 스티브와 비둘기로 소식을 주고 받는 제임스이고 바나나 잎 아래에서 카나비스 사티바, 그러니까 마리화나의 연료가 되는 풀을 키우는 스티브이다. 여기에 이주일을 닮은 예수를 모시는 아버지로부터 떠나왔건만 스티브의 아내 요코는 아폴로 13호를 신으로 모시며 토굴 속에서 살면서 지구정복을 위해 외계에서 침공한 파충류인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믿는다.


“B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가 A의 뺨에 키스를 한다. 나는 바게트를 오물거리며 B의 처세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철저히 토익화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나 같은 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궁하면 통하는 법이니 마리화나를 재배하는 스티브와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요코와의 대화에서도 토익 문제를 연상할 수 있던 내게 A와 B가 나타나는 것이다. 토익 시험을 보면서 항상 들을 수 있었던 리스닝 문제 출제 목소리의 주인공들인 A와 B가 바로 스티브의 농장 옆에서 또 다른 바나나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여러 악조건을 기회로 만들어가며 토익 만점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익사이팅한 사건들을 헤쳐간다.


“두 시간에 걸쳐 200문제를 풀었다. 시간 배합은 적당했고, 연필 필기감도 좋았다. 다만, 한쪽 눈으로만 지문을 읽어서 눈이 피로했다. 180번 문제를 풀 때쯤 왼쪽 눈이 꺼끌꺼끌했다. 10번 문제에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두 시간 내내 내 마음은 평온했다. 편백나무 오솔길을 느긋이 산책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토익 만점에 성공했냐고? 물론 그렇다. 그 사이 억지로 섹스도 해야 하고, 정말 인질이 되어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눈을 하나 잃어야 했지만 어쨌든 나는 990점이라는 점수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당당히 면접장소에 들어갔지만 “토익 만점이로군.” 이라는 면접관의 물음 아닌 물음에 자신뿐만 아니라 옆 사람과 그 옆 사람까지 “예.”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계량화된 평가 시스템에 대한 맹신과 더불어 과한 학력 인플레로 시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임을 감안하면 이런 소설이 더 일찍 나오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토익 시험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할 정도인, 그러나 실제적인 영어 이용 빈도나 영어 이용 수준을 볼라치면 어이가 없는, 이럴 거면 정말 복거일의 말마따나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절로 드는 세태를 떠올리면, 말 안 되기로는 소설의 내용보다 현실이 더하다. 그러니 황당무계한 소설의 설정과 진행에도 크게 토를 달기가 힘든 것이다.



심재천 / 나의 토익 만점 수기 / 웅진지식하우스 / 302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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