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식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에피소드는 신선하고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강아지처럼 산만한...

by 우주에부는바람

*2012년 3월 1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이 작가의 프로필에 눈이 갔다. 1965년생으로 평택에 있는 기지촌에서 자랐고, 고등학교 졸업 후 유랑 생활을 하다가 느지막히 추계예대에 입학하여서 육년 만에 졸업하면서 전업 작가를 꿈꿨으나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대필 작업을 해야 했으나 (이 대목에 특히 눈이 갔다.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생애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기회를 잡은 작가가 자신의 이런 이력을 고스란히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자신의 소설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이 장편소설로 아홉 번쯤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던, 단편에서도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 유령작가이자 통속작가였다는 고백의 프로필이 짠했고, 왠지 그냥 무작정, 이 소설을 사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 한동안 미친 듯 연모했던 진주. 나는 처음부터 진주가 위험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설레었고 사랑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 삶이 파괴당하리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직장 잃고 통장 잃고 신용 잃고 모든 걸 잃고 난 후에야 나는 내가 위험하고 슬픈 여자와 추억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소설은 잘 나가는 컨설팅 회사에서 촉망받는 컨설턴트로 인정받던 주인공 임도랑이 일종의 산업 스파이라고 할 수 있는 진주라는 여성에게 빠져서 그만 회사의 기밀을 외부로 유츌하게 되고, 그 일로 인하여 해고를 당한 이후 낙오자가 된지 일 년 여가 된 시점, 다섯 마리의 개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현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개들이 길에서 만난 또 다른 개를 물어 죽이는 바람에 그 일거리마저 잃고, 자신이 묵고 있던 고시원에서는 성추해엄으로 몰려 쫓겨나면서 상황은 더욱 꼬여가기만 한다.


“... 무기력했던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내 운명의 어떤 요소들이 변화를 일으켰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루지 못할 것들에 대한 욕망을 버렸거나 갈 수 없는 길을 깨닫고 자포자기한 그런 변화인 듯했다.”


그렇게 노숙자로 떠돌며 저녁에는 불판을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또 간간히 들어오는 역할대행 일거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나에게도 뭔가 운명의 역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라마라는 이름의 중국산 순수혈통 개가 자리잡고 있다. 이상하리만치 도랑만을 따르는 라마 덕분에 주인공은 이제 보다 어엿한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가 되고, 기나긴 운명의 굴레를 떨쳐 일어날 어떤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된다.


소설 초반이 조금 지루한 반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이야기에 속도감이 붙고 그 속도감과 어우러진 에피소드들도 읽는 맛이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인 임도랑을 둘러싼 과거의 여자 진주, 아르바이트중에 만난 식당 여종업원 미향, 역할대행으로 만난 은주와 라마의 주인인 대단한 집안의 귀족녀 윤미라까지 들쑥날쑥 하는 여성들의 등장과 퇴장에 일관성이 없다. 여기에 몽몽병원 원장과 삼손, 그리고 재혁 학생과 그를 괴롭히는 학생 무리까지 남성 조연들도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물론 등장인물이 많다고 해서 모두 그런 것을 아닐 터이나...) 이야기가 어느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못한채 계속 맴을 돌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수상작을 뽑는 당사자들이 (소설은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그 결정 이유로 밝힌 ‘웰 메이드’ 소설이라는 점에는 일견 수긍하지만, ‘언어나 플롯의 낭비’가 없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언어나 플롯의 낭비’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이야기 혹은 에피소드의 신선함에서 강점을 보여 ‘웰 메이드’ 소설의 마지막 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탈 수 있었다, 정도가 적절한 선정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많은 시간 소설 쓰기의 작업을 놓지 않으며, 구체적인 삶의 에피소드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았을 작가의 또 다른 장편에서는 더 나은 이야기의 수렴을 기대해 본다.



전민식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은행나무 / 293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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