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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에르베 르 텔리에 《아노말리》

철학과 종교, 도덕과 윤리가 총망라된 흡입력 최고의...

  드디어 이야기의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아노말리》의 1부의 작은 챕터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 펼쳐진다. 독자인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그러니까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인물들의 스케치를 읽게 된다. 연쇄 살인범의 소행이라고 밝혀지기 전까지 그러니까 피해자들 사이의 연관 관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파편화된 사건을 들여다보는 기분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 그 후로 블레이크는 두 개의 삶을 꾸려 왔다. 이쪽 삶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자, 스무 개의 성(姓)과 그만큼 많은 이름, 그만큼의 온갖 국적의 여권을 소지한 자다. 진짜 생체 인증 정보들도 있다. 아무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저쪽 삶에서 그는 조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본사를 둔 멋진 회사를 꽤 오래 운영해 왔다. 채식 요리를 집으로 배달해 주는 회사인데, 보르도와 리옹에 지점을 두었고 지금은 뉴욕과 베를린에도 지점이 있다. 동업자 플로라는 그의 아내이기도 하다. 그들의 두 아이는 아빠가 출장을 너무 자주, 너무 오래 간다고 불만이 많다. 사실이 그렇긴 하다.” (pp.21~22)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다루는 첫 번째 인물인 블레이크가 타고났고 이후 연마된 살인자라는 사실은 나름 상징적이다. 특히나 그는 살인자(블레이크로서)와 평범한 가장(조라는 이름으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나중에 이야기의 실체가 밝혀진 다음 이 부분 또한 블레이크가 첫 번째 인물이어야 하는 이유를 넘겨짚을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블레이크는 이미 두 명의 인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좀 더 치열하게 살았다면 세상을 어느 해안으로 데려갔을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사라진들 세상의 스름이 뭐가 바뀔까. 이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자갈들의 길을, 아무 데로도 데려가 주지 않는 길을 걷는다. 나는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산 자의 가면이 죽은 자의 얼굴에서 안식을 찾는 하나의 점이 되어 간다. 오늘 아침, 청명한 날씨 속에서 나는 나를 본다. 나는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헛되이, 마침내 나는 순간을 미루지 않을 마지막 문장을 쓴다.” (pp.38~39) 


  블레이크 다음에 다뤄지는 인물인 빅토르 미젤 또한 매우 흥미롭다. 그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인 《아노말리》를 쓴 다음 – 하지만 에르베 르 텔리에의 소설 《아노말리》와 빅토르 미젤의 소설 《아노말리》는 여러 면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추락의 방법으로 자살을 한다. 이 또한 상징적인데, 추락의 방법으로 3월에 착륙한 비행기에 탔던 빅토르 미젤이 죽은 다음, 추락의 위기를 이겨내고 6월에 착륙한 비행기에 탔던 빅토르 미젤이 살아 돌아오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이라는 발상에 대해 내 생각을 밝히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다고 바뀔 건 없습니다. 나는 유물론자입니다. 사유하는 것과 사유한다고 믿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고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도 차이가 없고요.”

  “그렇지만 필로메드,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우리가 가상인 것이 완전히 같지는 않겠죠.” 여성 진행자가 말한다.

  “실례지만 그 둘은 같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고로 설령 내가 생각하는 프로그램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존재합니다. 내가 사랑과 고통을 느끼는 방식은 바뀌지 않으며, 나는 고맙게도 확실히 죽을 겁니다. 그리고 세계가 가상이든 아니든 내 행동의 결과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p.432~433)


  (이미 오래 전 출간된 책이므로 별다른 죄책감없이 스포일러를 공개하자면) 이야기의 실체는 이렇다. 어느 6월 뉴욕과 파리를 오가는 여객기 한 대가 난기류를 뚫고 나온 미국의 한 공군 비행장으로 인도된다. 이유인즉슨 이 여객기는 이미 이백 명이 넘는 탑승객과 함께 지난 3월 무사히 파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세상에는 아예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이백 명이 넘는 똑같은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고통을 무장 해제한다.

  잉어가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가 떨어지는 소리에 그들은 소스라친다.” (p.361)


  이처럼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이야기가 소설의 시작에서 끝까지 매우 진지하게 전개된다. 블레이크는 자기 자신인 블레이크를 살해하고, 빅토르 미젤은 이제 자신이 실제로 쓴 것이 아닌 소설 《아노말리》의 저자가 되었다. 이외에도 소설 속에서는 3개월 전에 도착한 자신과 대면해야 하는 3개월 후의 자신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철학과 종교, 도덕과 윤리가 총망라된 천재적인 작품이라 여겨지는데, 대중적인 흡입력까지 갖추고 있다.



에르베 르 텔리에 Hervé Le Tellier / 이세진 역 / 아노말리 (L’ANOMALIE) / 민음사 / 479쪽 / 2022 (2020)



  ps. 소설을 읽고 <매니페스트>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는데 조금은 다른 설정이다. 소설 속의 비행기는 3월에 한 번, 그리고 같은 비행기가 6월에 또 한 번 나타난다면 드라마 <매니페스트>의 비행기는 아예 사라졌다가 5년 후에 같은 비행기가 다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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