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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장정일의 독서일기 6》

한식과 중식과 양식이 망라된 푸짐한 한 상 차림을 받은 것처럼...

by 우주에부는바람

“보혁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쾌락을 쫓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민주사회란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다. 때문에 시민이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시민은 책을 잃는 사람이라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독서는 민주 사회를 억견臆見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좀 과격한 독서론일지는 모르겠으나 요 몇 년 동안 내가 도달한 생각은 이러하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읽다보면 과거의 장정일과는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과거 장정일의 시집과 몇몇 거친 소설들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회 참여적으로 해석이 되었거나 진보적인 제스처로 받아들여진 것과는 달리 최근의 장정일은 분명하게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는 독서일기를 작성하고 있구나 싶었는데, 그 시작이 어쩌면 이 책일런지도 모르겠다. 책의 서문에서 장정일은 ‘민주사회’에서 ‘나쁜 시민’이 되지 않기 위한 ‘과격한’ 독서론을 피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 저자는 또 일간지와 신문, 격월간지, 월간지, 계간지 등속의 읽을거리에 묻혀 사는 자신과 현대인들을 자조하며 사람이 무엇을 감상하려면 멈추어야 하는 것처럼 무엇을 생각하고자 한다면 잠시 활자로부터 눈을 떼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정일이 민주 투사나 강단 운동가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전방위적인 관심이 불러낸 다원적인 책읽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중국 불교의 역사에서 전쟁 스킬에 이르는 광범위한 독서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헤맨다. 그러는 중 라끌레르끄의 <게으름의 찬양>을 통해서는 생각하기 위한 현대인의 자세를 되새기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걸신 들리 듯 (수동적인) 읽는 행위에서 멈추지 말고,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멈추고 생각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조언 앞에서는 활자 중독증에라도 걸린 듯 무엇이든 읽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독자인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 헨리 밀러나 아나이 닌의 ‘성문서’는 예술가적 욕망이 조탁된 것이다. 다시 말해 ‘고백의 예술화’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카트린 밀레의 ‘성문서’는 예술가적 욕망의 발현이라기보다는 ‘고백의 일상화’ 또는 ‘일상의 고백화’를 실천한다.... 우리는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적이고 은밀해야 할 성을 고백해야 하는 것일까? 핸드폰 동영상, 셀프 카메라, 아침 텔레비전 프로의 시시콜콜한 대담, 컴퓨터 채팅, 자기 과시적인 홈 페이지…… 어쩌면 《카트린 M의 성생활》은 기념비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고백이 ‘운명’이 아니라 ‘여흥’이 된 시대의.”


그렇게 그 기저에 사회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의지의 심지를 조용히 불태우는 장정일의 독서를 따라가는 일은 한식과 양식과 중식을 두루 포함하는 정식 한 상을 받는 일처럼 풍성하다. 그 중에는 십여년 전 이미 ‘여흥’처럼 고백을 하는 ‘고백의 일상화’를 정확히 포착하는 서평의 부분처럼 더욱 손이 가는 반찬도 있고 말이다. 여하튼 이렇게 이번 독서를 통하여 또 몇 권의 사고 싶은 책 목록이 늘었으니,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지도자』, 쥴푸 리반엘리의 『살모사의 눈부심』, 러끌레르끄의 『게으름의 찬양』이 그 책들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6 / 장정일 / 범우사 / 279쪽 / 200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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