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베 세이코 《딸기를 으깨며》

딸기 으깨는 서른 다섯 이혼녀, 여든 살 노작가의 손을 통하여 해방되다.

by 우주에부는바람

“... 지금은 서른다섯, 황금의 서른다섯, 한창때인 서른다섯, 뭐든지 알고 있는 - 그렇다고 믿는 - 서른다섯, 건강미 넘치고 터질 듯 속이 꽉 찬 서른다섯, 맛있는 것 좋은 것을 제일 잘 아는 서른다섯, 인생의 참맛, 여자로 태어나 행복했어, 행복했어, 행복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서른다섯, 남자의 참맛, 남자의 사랑스러움, 남자의 매력, 남자의 훌륭함, 남자에 대한 욕구를 너무나 잘 아는 서른다섯이다, 지금 나는...”


서른다섯 이혼녀 노리코는 이렇게 당당하기 그지 없다. 두 살 연하의 남자 (게다가 엄청난 부자집 도련님인) 고와 결혼을 하였던 노리코는 몇 년 전 이혼을 했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물론 결혼 생활이 최악이었다고 보지도 않고, 전남편이 된 고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혼자인 삶이 그녀를 홀가분하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징역으로 이혼을 한 자신을 출소자로 여길만큼 유쾌해졌다.


“... 헤어진 뒤에야 비로소 거기에서 해방되어,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구나!’ ‘싸늘하니 청결한 침대에서 한가로이 잠들 수 있겠구나, 그것도 나 혼자서’라는 생각이 행복했었다. 항상 침대에서 둘이 잠들고, 내 공기마저 빼앗기고 있는 듯한, 산소결핍증에 시달리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소설은 그렇게 이혼녀로 오사카에 살고 있는 노리코가 마음이 맞는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들과 보내는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소박하다면 소박하고 담백하다면 담백한 소설이다. 그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여행을 하고 하는 것이 전부이다. 큰 사건이라면 전남편을 우연히 만나고, 그와 어영부영 찐한 농담을 섞는다는 것 정도랄까...


“안절부절못하고 마음이 황폐해지는 늙음, 그것은 ‘늙음’이 아니라 그저 ‘노인이 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야기도 고만고만하고 그 이야기들의 진행이나 사이사이 박혀 있는 사건들도 고만고만한 소설을 읽고 놀란 것은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 때문이다. 사십여년 전에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였고 이후에도 각종 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 연애소설의 대가라고 불리우는 소설가가 우리 나이로 여든 살에 이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제야 뜨악, 입을 벌리게 되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진심에서 하는 말인지 아닌지, 30년 정도 살다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건성건성 사는 듯한 이 여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 일상적이고 가볍지만 나름 진정성이 있네, 라고 여겼는데 여든 살 노작가가 쓰는 연애소설이라면 (사실 이번 소설을 연애소설로 분류할 수 있나 싶지만...) 알듯 모를 듯 진심이 섞이지 않을 수 없겠다 싶기도 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마지막 즈음에 “인생의 ‘사실’은 ‘이야기’로 승격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라는 말이 나온다. 여든 살 노작가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살아낸 인생의 많은 ‘사실’들이 어느 순간 ‘이야기’로 승격되는 과정을 거치니 이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여하튼 부럽다. 여든 살 나이에 이만큼 푸석하지 않고 나름 찰지고 윤기가 감도는 소설을 써낼 수 있다니...



다나베 세이코 / 김경인 역 / 딸기를 으깨며 (いちごをつぶしながら) / 북스토리 / 335쪽 / 20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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