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보낸 세계 작가들과의 한 때...
시인이 1994년 8월 28일에서 1995년 1월 16일까지 작성한 일기를 모은 산문집이다. 2021년에 <어떤 난무들은>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난다에서 개정판이 나왔다. 일기의 대부분은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 시티 아아이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며 작성하였다. 프로그램은 3개월 과정이고 이후 필요에 의하야 한 달 보름여를 더 미국에 머무른 것이다.
“오늘 메이플라워 맞은편 잔디밭을 가로질러 아이오와 강변으로 갔다. 잔디밭에 달맞이꽃들이 피어 있었다. 강변 벤치에 누워 오리들이 떠 있는 강물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건 로드 맥튄이라는 싱어 송 라이터가 쓴 시집 중에 나오는 구절이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시집을 읽다가 기억해 둔 것인데 이상하게도 몇십 년이 지나면서도 그의 다른 시들은 다 잊어버렸으면서도 그 구절만큼은 잊혀지지 않고 내 기억력의 서랍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글쎄 오늘은 좀 외로웠었나, 아니면 나의 앞날이 불안해졌었나. 그 구절은 이렇다. <Lonely rivers going to the sea give themselves to many brooks.> 이건 내가 슬며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다시 되살려보곤 하는 구절이다. <바다로 가는 외로운 강물은 많은 여울들에게 저를 내준다.>” (p.36)
시인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나라 작가들이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이 프로그램에 다수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한강은 1998년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시절의 기록을 회상하여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가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라는 제목으로 2003년에 출간했다. 소설가 김유진은 2015년에 참가했고 《받아쓰기 : 내가 머문 아이오와 일기》라는 산문집을 2017년에 냈다.
“...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미국인들의 사고는 언제나 하나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는 거다... 물론, 그 다음엔 그들은 또 한 가지를 알아낸다... 그들은 끊임없이 직선적으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나아간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밖에 모르면서, 아니 하나밖에 모르지만, 그 하나 다음에 도다른 하나, 그 다음에 또 또다른 하나, 이렇게 직선적으로 나아가면서 전체의 종합을 향해 간다.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은 가만 보면 맨 처음에 전체를 본다. 아니 맨 처음에 전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자체 내에 포함된 세부를 향해 나아간다. 예를 들면 주역이라든가 아니면 사상의학이라든가 하는 것에서는 처음에 전체, 종합, 개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무한히 세부를 향해서 나아간다...” (p.101)
1995년이라면 여행자유화 조치가 발동된 1989년에서 6년이 흐른 시점이다. 여행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아직 글로벌한 교류가 쉽지 않은 시절, 시인의 눈에 비친 아메리카의 여러 생소한 풍경들이 자주 등장한다. 나뭇잎 색의 변화라는 성질이 우리의 나뭇잎과 다르다거나 하는 날씨의 생경함부터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 대학가 분위기 등도 시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뜰히 살핀다.
“... 캐롤라인의 내 시에 대한 소감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트롱, 파워풀, 디스트럭티브였고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뷰티풀. 내 시를 읽은 사람들이 소감을 말할 때마다 첫마디가 스트롱이고 그 다음이 파워풀, 그 다음이 디스트럭티브다. 뷰티풀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p.118)
프로그램 참가를 위하여 자신의 시를 번역해 간 시인은 이미 당시에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어체 영어에는 꽤 익숙한 편이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하는 데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의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뒤늦게 텔레비전을 들여놓기도 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열심히 듣기도 한다. 황색 잡지라고 불리는 잡지의 Q&A 또한 열심히 살피는데, 그 모양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한 점은, 나는 어디를 돌아다니길 싫어하는 성미이고 내가 묵고 있는 거처를 떠나길 싫어하는 성미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떠나서 다른 곳에 도착하면 그걸 곧바로 내 집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떠나기 전까지는 내가 머물고 있던 곳을 떠나기 싫어하고 (왜냐하면 그게 내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일단 떠나 다른 집에 도착하면 그게 곧바로 내 집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성격이 제미니좌의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호로스코프를 보니까 제미니의 성격 중의 하나가 거의 어디서나 그곳을 제 집으로 느끼고 자기 의혹을 거의 갖지 않는다는 것이 나와 있었다.” (p.264)
얼마전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읽었다. 시인의 1989년 산문집이 개정되어 나온 것이다. 안타까움 속에서 1995년에 나온 《어떤 나무들은》을 찾아서 읽었다. 1995년 4월에 나온 1판 1쇄의 책이니 아마 당시에 이미 읽었을 것이다. 정리해 놓은 흔적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다. 나와 아내 중 누가 구매하여 우리의 책장에 머물게 된 것인지도 잘은 모르겠다. 어쨌든 아내는 당시 최승자 선생에게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최승자 / 어떤 나무들은 ―아이오와 일기 / 세계사 / 291쪽 / 1995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