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찬 《오래된 빛》

피해자에게도 가해자에게도, 그리고 그들 가족에게도 비극의 굴레가 되어버린

by 우주에부는바람

여기 한 가족이 있다. 대학생인 아들과 초등학생인 딸, 그리고 엄마와 아빠로 이루어진 아주 평범한 가족이다. 하지만 이 가족의 퍼즐에는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한 개의 퍼즐 조각이 있다. 그 조각이 사라지고, 많인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은 그 시간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아주 오래전 사라진 빛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 탓이다.


“한 해 동안 추악한 시간이 흘렀다. 식구들은 살아 있었지만 살아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 있었다. 한 해가 지나 창호의 기일이 가까워지자 아내는 집을 나갔다. 그 사흘 동안 아내를 찾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아내의 얼굴은 시멘트로 빚어놓은 것 같았고 그래서 문지르면 가루가 부스스 떨어질 것 같았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아내가 끔찍했다. 그 시절 태어난 아기는 그 시절의 영원한 증거가 되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오래전 창호라는 아이가 죽었다. 그 죽음에는 기환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창호는 기환으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었고, 어느 날 기환의 명령에 의해 산에 올랐다가 실족사하였다. 창호의 아버지는 주변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기환을 찾아가지만 결국 기환의 아버지에게 제지를 당하여 쫓겨난다. 이후 기환과 그의 부모는 그 동네에서 사라진다. 피해자인 가족과 가해자인 가족이 있지만, 법적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고 그 무기력함 속에서 창호의 부모는 근근히 시간을 흘려 보냈다.


“...삼 년 전 박선명을 다시 발견한 뒤, 한창 그자를 추적할 때는 그 일을 일컬어 시간을 매듭짓는 일이라 불렀다. 봄볕 아래에서 그자를 만났을 때, 그자는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자는 그 시간 - 창호가 죽은 뒤 새로이 탄생한 그 시간에서 벗어나 먼 곳에 살고 있었다. 그자를 그 시간 속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리고 매듭짓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창호의 아버지는 기환의 아버지를 쫓아 지방의 소도시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의 뒤를 바짝 쫓은 탓에 이제 그의 숨통을 끊어 놓을 빌미를 어렵사리 손에 쥔 상태이다. 이것을 잘만 활용하면 그를 파멸시킬 수 있고, 모든 것을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창호의 아버지는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습득한 증거를 전달하러 온 젊은 흥신소 직원에게 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물론 그 흥신소 직원은 그 이야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런가하면 창호의 가족의 반대편에는 기환의 가족도 있다. 창호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 기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기환이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동네를 떠났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살아갈 방편으로 마지막 거래를 성사시킬 작정이다. 하지만 창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아들을 손찌검하던 아버지는 이제 대학생이 된 아들을 향해서도 여전히 폭행을 가한다. 자신이 저지른 가해의 행위에 대해 정확히 짚고 넘어가지 못한 기환은 음주운전으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문제아가 되어 있고, 아버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러한 아들을 용납할 수 없다.


소설의 진행은 가해자와 피해자, 살아 남은 자와 죽어 부재한 자 사이를 둘러싼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그리고 이제 가해자였던 한 소년은 피해자일 수도 있는 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오래전 죽은 피해자는 살아남은 가해자의 현재를 간섭한다. 죽은 피해자의 가족은 살아남은 가해자 그리고 가해자의 가족에게 깊숙이 개입한다. 그리고 소설은 이 비극의 정점을 향하여 달려간다.


왕따를 비롯하여 학교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시의적절한 소재일 수 있겠다. 피해자에게만 비극인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비극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아니 오히려 가해자에게 더욱 비극적일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로도 소설은 작동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들의 이러한 관계 설정이 워낙 미리부터 이뤄지고 있다 보니 소설은 이미 예측되어 있는 도착역을 향해 달리는 열차처럼 뻔한 행로를 지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소설의 말미 극단적인 설정을 삽입하기는 하지만, 도착역을 앞둔 열차가 기적소리와도 같다. 깜짝 놀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도착지에 대한 예상이 빗나가지 않으니 어딘지 싱거운 여행이 되고 말았다.



전수찬 / 오래된 빛 / 문학동네 / 207쪽 / 20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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