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대하는 어떤 숙명의 자세에 마음껏 자극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용인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처음 야구를 접하였다. 초등학교 때까지 야구는, 우리들의 시절에는 아주 보편화된 운동이 아니었다. (프로야구가 개막한 1982년에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아마 어렵사리 글러브를 사서 누군가에게로부터 캐치볼을 배웠을 것이고, 다른 친구의 배트를 빌려서 날아온 공을 맞추는 연습을 했을 것이다. 군인 아파트에서 살았던 나는 군인의 자식들과 함께 주말이면 야구 시합을 하였고, 여름이면 길어진 태양에 감사하며 주중에도 야구 시합을 하였고, 방학이 시작되면 이렇게 고마울 때가 하면서 주말과 주중을 가리지 않고 야구 시합을 하였다.
당시 나의 포지션은 포수였고, 날아온 공에 맞아 기절을 한 적도 있다. 홍키공이라고 불렀던 공을 사용한 날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어렸을 때는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였고, 조금 커서는 연식공으로 그리고 이보다 딱딱한 경식공으로 점점 강도를 높여나가다가, 아주 가끔 실제 야구 선수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실밥이 오돌토돌 들어가 있는 홍키공을 사용하고는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날 포수를 보던 나는 파울팁으로 날아온 공에 얼굴을 맞아 (캐처 마스크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하였으니)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렸지만 한동안 얼굴의 일부에 멍이 들어 시꺼멓게 변해 고생해야 했다. 물론 그러한 몰골로도 야구를 멈추지 않았으니 당시의 야구 사랑은 꽤 깊었다. 하지만 당시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듯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간혹 프로야구를 시청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야구로부터 멀어졌으니, 그 사랑이 영화 속 오클랜드 애슬리틱스의 단장인 빌리 빈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영화는 마이클 루이스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빌리 빈 단장의 성공 신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뉴욕 양키스와 같은 거대 구단과 비교하여 3분의 1수준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2001년 아메리카 리그 4강까지 올라가는 저력을 보였던 오클랜드 애슬래틱스가 다음해 철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선수 선발만으로 (그러니까 돈을 지지리도 안 쓰고서)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야구를 대하는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의 사고 방식의 차이, 단장과 감독 사이의 대립, 야구장에서 흔하디 흔한 징크스 깨기 등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진진하다. 야구 영화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경기가 벌어지는 야구장 내부 보다는 락커룸이나 구단 사무실 등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간혹 등장하는 경기 장면이 더욱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특히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는 그날, 절대 자신의 팀이 치르는 경기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빌리 빈이 결국 차를 돌려 경기장을 찾고, 경기 초반 무려 11대 0이라는 스코어로 이기고 있던 팀이 점수를 내기 시작하며 11대 11까지 몰리게 되는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서 빌리 빈이 영입한 싸구려 선수가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20연승을 완성하는 장면은 어째서 야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벗어나 하나의 스토리가 되고 역사가 되는지를 잘 알려준다.
여기에 더해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거액의 연봉 제의를 받고 돌아온 빌리 빈에게 피터가 보여주는 마이너리그 선수의 경기 장면은 묘하게 심금을 울린다. 그러니까 거구의 몸 때문에 타력은 좋지만 2루로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한 선수의 게임 장면인데 내용은 이렇다. 그 날도 힘차게 타구를 날린 그 선수는 전력을 다해 달리다가 1루를 돌아 2루로 향하던 순간 그만 넘어지고 만다. 놀란 선수는 다시 일어나 2루로 뛰는 것이 아니라 엉금엉금 1루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선수를 대하는 1루수의 태도가 이상하다. 알고보니 그 선수는 사실 때린 타구는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수는 일어나 겸연쩍은 표정으로 1루를 떠나 2루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모니터로 바라보던 빌리 빈은 말한다.
“이래서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이어지는 자막을 통해 우리는 빌리 빈이 보스턴 레드삭스의 고액의 연봉 제의를 물리치고, 결국은 마지막 게임을 승리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한 구단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의 단장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떠한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이 어디 한 가지 뿐이랴. 빌리 빈은 빌리 빈의 방식으로, 피터는 피터의 방식으로, 그리고 영화 속 많은 선수들은 그 선수들의 방식으로, 야구장의 관객은 또 그들 관객의 방식으로 야구를 사랑한다. 그렇게 영화는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을 지닌 자들을 혹은 어떤 사랑의 마음으로 그 숙명에 고개 숙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과거의 한 때 그런 시절을 겪었던 영화 관객을 포함하여) 마음껏 자극하고 있다.
머니볼 (Moneyball) / 베넷 밀러 감독 / 브래드 피트, 조나 힐 출연 / 132분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