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은사'가 걸어온 한국 현대사의 발자취에 현혹되어라...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출생, 1945년 해방 당시 15세 학생, 1950년 한국전쟁 당시 22세로 유엔군 연락장교단에서 근무, 1960년 4·19 혁명 당시 32세로 합동통신사에서 기자로 근무, 1961년 5·16쿠데타 발발 당시 33세 합동통신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박정희의 첫 미국방문에 수행기자로 동행하였으나 박정희의 의도와는다른 특종 보도를 한 후 강제로 소환, 1964년 조선일보 정치부로 옮겨서 외신부장까지 지냈으나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퇴사, 1970년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근무하였으나 이듬해인 1971년 군부독재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강제 해직,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1974년 46세에『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출간, 1976년에는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 해임, 1977년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8어인과의 대화』에 실린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만기 출소하였고 사면 복권되어 교수직 복직되었으나 같은 해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날조되며 구속과 석방을 거쳐 다시 교수직에서 해직, 1988년 60세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이사 및 논설고문 역임, 1995년 67세(만65세)에 하양대학교 정년퇴직, 2000년 72세때 뇌출혈로 우측 반신마비, 2005년 77세 때 『대담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한길사)을 출간하였고 2010년 82세의 나이로 지병으로 타계...
“.. 내 글에는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 없어. 정치이론도 사회비평도 다각도로 교차검증한 다음에 일단 소화하고, 내 머릿속에서 내 것으로 만들고, 충분히 반죽해서 자신의 누룩을 가미해서 발효시켜서, 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언론인이자 학자였으며 ‘사상의 은사’라고 불리운 리영희 선생의 약력이다. 일제 시대와 해방, 한국전쟁과 이승만 정권, 4·19 혁명과 박정희 군부독재, 광주민주화 운동과 전두환 군사정권,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동안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 유예, 세 번의 징역’을 거친 선생이 뇌출혈 이후 정상적인 집필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이후, 문학평론가인 임헌영과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시킨 자서전이 바로 2010년에 출간된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다.
“...국내에서는 우익적 사상의 지식인들은 이광수나 김동인, 서정주뿐 아니라 거의 모두가 친일파가 됐던 거요. 좌익 인사들이 항일과 독립운동의 주축이었지. 해방 후 세대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그 사실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음미할 필요가 있어... 민족은 식민지에서 해방됐다는데, 일본 제국주의 식민권력에 빌붙어 살았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 하나도 숙청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어. 그런 민족의 병충과 잡초들이 일본식민권력 대신에 새로 군림한 미국 군대의 통치, 즉 미군정에 포섭되어 나라의 온갖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니, 그 사회에 무슨 도덕이 있으며, 윤리나 정의나 동포애가 있었겠어요? 그냥 ‘정글의 법칙’이 사회규범이었지...”
한국 현대사의 격랑기를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동시에 잘 벼려진 사상의 칼날로 시대를 해부한 사상가인 선생의 삶과 생각이 온전히 담겨져 있는 책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읽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 이미 선생이 쓴 책들은 전설이 되어 있었다. 물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시작된) 그 당시 이미 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이 득세하였지만 결국 지금까지 온전히 살아 남은 것은 바로 선생이 저술한 책들이다.
“... 나는 우리의 지나간 역사적 사실과 현상들의 해석에서도, 기성의 이데올로기화된 이론이나 학설, 또는 ‘자민족을 미화하는 편향’에 대해서는 좀더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 계급주의 이론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재단하려는 자세는 자칫 ‘지적 현실도피’가 아니면 ‘이념의 화석화’ 또는 교조주의가 되지 않을까요?”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지속된 (조선시대만큼이나) 폐쇄적이었던 기간 동안 선생은 끊임없이 자료들을 모으고, 그 자료들을 분석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였으며, 그렇게 축적한 진실들을 세상에 알렸다. 자신에게 돌아올 위해들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감내하였으며, 선생은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평생 자신이 존경하였던 노신의 철학을 곁에 두며, 잘못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택하는 대신 냉정하게 우리 민족의 허와 실을 살폈고, 이러한 살핌을 통해서만 우리 민족이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일부 한국인들의 이같은 자기중심적 우주관과 역사관, 유치하고 맹목적인 민족주의를 경멸해요. 그런 교수·지식인·단체는 조금은 ‘비애족주의’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진실이 보이고, 진실이 보여야 허황된 견강부회식 자민족 과대망상증에서 풀려날 수 있어요. 그러면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민족의 모습이 보일 거요. 그때부터 냉철한 이성으로 민족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 없이 오직 자신이 파악하여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할 수 있었던 사실들만으로 세상을 살폈기에 누구보다 더 진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바를 취사선택 하지 않았고, 바뀌어버린 세상의 흐름을 모른 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역동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사상 또한 끊임없이 역동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 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는 ‘인간’ 생명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인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현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패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평등으로만 가능하지만, 현실적·사회적 생존차원에서는 개개인에게 가치 있는 자유가 먼저이고 다음에 평등을 욕망하게 되니까요.”
시간이 된다면 선생의 책들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어진다. 세상을 그저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세상의 핵심을 읽어 내는 힘을 기를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일은 쉽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당하지 않고, 포착되지 않는 이면을 읽어내는 일에 비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진정 현혹당해야 하는 것은 이 쉽지 않은 길을 걸었던 ‘사상의 은사’의 발자취이다. ‘대화’를 통하여 그 발자취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라고 말하고 싶다.
리영희 / 대담진행 임헌영 /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한길사 / 746쪽 / 2005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