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문화의 통일을 가로막는 먹그름의 빗장이 걷힐 그날을 위하여...
“눈 내린 들판길을 갈 때
모름지기 어지럽게 가지 말 일이다
오늘 내가 간 자취를 따라
뒷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느니.“ - 서산대사
1997년 9월, 드디어 저자가 평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베이징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타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고은 시인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리고 그때 그 떨리는 심정을 지닌 유홍준을 향하여 위에 있는 저 서산대사의 시구를 기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첫 발자욱을 디디게 된 자의 심정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12일간는 짧은 기간 동안 이뤄진 답사의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내놨다. (원래 책은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라는 제목으로 상권과 하권이 중앙M&B에서 1998년 출간되었으며, 2011년 창비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4권과 5권으로 재출간되었다.)
이처럼 남한의 연구자로서는 첫 번째 발자욱을 내딛는 작업이었으니 그 설레임만큼이나 한계도 분명해 보인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폐쇄적인 곳이면서도 별다른 통역이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같은 민족이 사는 곳, 이러한 아이러니는 답사 내내 작가를 따라다닌다. 취사와 선택이라는 사소한 문제가 이후 이러한 답사의 지속 가능성가 맞닿아 있고, 어떤 식으로 글을 쓰든 남과 북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히리라는 판단 또한 작가를 난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남한지역을 말할 때와는 달리 심각하게 고려한 두 가지 사항이 있었다. 하나는 분단 50년 만에 처음 빗장을 열고 들어가 직접 안살림을 보고 온 사람으로서 우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한평생을 사이좋게 지내온 부부 사이에도 반드시 건드려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오랜 별거 끝에 문화유산을 통해 재결합을 시도하는 마당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대승적인 차원에서 피해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다. (편견을 우려하여) 주체적인 시각 대신 불가피하게 배제를 선택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그 방북의 기간 동안 평양의 대동강과 그에 딸린 명소들, 호모 에렉투스의 살림터인 상원 검은모루동굴과 고인돌 유적지,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 묘향산의 유적들, 진파리와 강서의 고구려 무덤들에 대한 설명을 빼곡하게 채워간다.
“북한에서 고고학을 비중있게 다룬 것은 민족적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민속학은 인민의 삶과 생활정서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연구해온 것이다... 이에 반해 미술사는 근본적으로 지배층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부정적 시각으로 보며 아주 홀대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동안 더욱 독자의 눈을 잡아 끄는 것은 오히려 문화유적 외적인 것들이니 이는 어쩔 수 없는 (독자의) 한계라고 봐야 하겠다. 독자인 나는 자꾸만 남과 북의 어떤 차이나 간극에 대한 정보에 더욱 귀가 솔깃하고, 그가 본 유적들이 아니라 그 유적에 이르는 길에 보는 그쪽의 풍광이나 그쪽의 사람에 대해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자들의 심정을 모르지 않는 작가 또한 그러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에피소드들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작가의 답사가 이루어졌던 그때로부터도 이미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또 지나갔다. 그 사이 양쪽을 가로막고 있던 빗장이 풀릴 수도 있겠구나 기대가 있었지만, 현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러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언젠가 이 빗장이 풀리는 순간 활짝 개인 평양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는 없다. 남과 북의 문화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로 통합하여야 일은, 어느 때고 이루어져먄 하는 민족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유홍준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 창비 / 365쪽 / 2011 (2011, 1998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상권> 중앙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