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루시다와 밝은 방, 그 사이 어디에선가 사라진 푼크툼...
<카메라 루시다> 라는 제목으로 1986년 출간되었고 많은 매니아를 갖추고 있는 책이지만 절판이 되어 책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2006년 <밝은 방>이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전 <카메라 루시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에 비해 <밝은 방>에 대한 반응은 그만큼 따듯하지 않았다.
언뜻 생각하니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책 속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롤랑 바르트의 책이라는 스투디움을 좋아하고 욕망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카메라 루시다>에서 독자들이 느낀 푼크툼, 그러니까 책으로부터 받게 되었던 ‘찔린 자국’, ‘작은 구멍’, ‘조그만 얼룩’, ‘작게 베인 상처’와도 같은 것을 (비록 같은 내용이되) <밝은 방>은 주고 있지 못한다, 라고 독자들은 여기는 것 아닐까.
“... 이른바 선진화된 사회들을 특징짓는 것은 오늘날 이 사회들이 예전의 사회들처럼 믿음을 더 이상 소비하지 않고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쩌면 롤랑 바르트의 책의 내용(혹은 믿음)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로 표상되는 지적 욕망(혹은 이미지)을 소비하였던 것은 아닌지 싶다. 끊임없이 현학적으로 천착하며, 그렇게 물 흐르듯 사유의 구속에 철저히 구속당함으로써,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 주는 모호한 아름다움은 여전한데도 말이다.
“모험의 원리 때문에 나는 사진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 그 반대로 모험이 없다면 사진도 없다.... 음울한 사막에서 갑자기 어떤 사진이 나에게 다다른다. 그것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그것을 존재케 하는 그 매력을 이런 식으로, 즉 생기 불어넣기로 명명해야 한다. 사진 자체는 전혀 생기 있는 게 아니지만(나는 ‘살아 있는’ 사진들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것이 모든 모험이 수행하는 것이다.”
책은 프랑스의 영화 평론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요청을 하여 작성된 사진에 대한 산문집이다. 물론 사진에 대하여 사진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이자) 사진의 대상이자 사진의 관람자인 자신의 생각을 집요하게 (그러나 어쩌면 딱 적절한 분량만큼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책에는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이 기호학자와 사진이라는 장르 사이의 부조화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책은 '사진의 특수성‘에서 ’길들여진 사진‘까지 모두 마흔 여덟 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물 네 개씩 두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챕터를 통하여 내내 사진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고 이를 명명하기 위하여 애를 쓰던 롤랑 바르트는 하지만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가면서 이를 모두 취소하고, 보다 구체적인 어떤 것 그러니까 자신의 어머니의 사진을 대상으로 한 글을 다시 시작하고, 그리고 종료시킨다. 바로 이렇게...
“미친 것인가 현명한 것인가? 사진은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사진은 사실주의가 미학적 · 경험적 습관(미용실이나 치과에서 잡지들을 뒤적이는 것)을 통해 완화되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다면 현명하다. 이 사실주의가 사랑의 두려운 의식에 시간이라는 글자를 되돌아오게 하면서 절대적이고, 말하자면 본원적이 된다면 미친 것이다. 사물의 흐름을 뒤바꾸고 내가 결국 사진적 황홀함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본질적으로 유도적인 움직임인 그 시간을... 이상이 사진의 두 길이다. 사진의 광경을 완벽한 환상들의 문명화된 코드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진 안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완강한 현실의 깨어남과 대결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다.”
롤랑 바르트 / 김웅권 역 / 밝은 방 : 사진에 관한 노트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 / 2006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