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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1. 2024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자기합리화의 언설 대신 작은 선의를 키우려는 마음으로...

  “17년 동안 승려로 살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pp.7~8)


  책을 많이 읽고 여러 종류의 사람과 부딪치며 다양한 일을 하면서 나이를 먹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혜안이 생길 것으로 기대하며 살았다. 하지만 아 실컷 살았다,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고 나서도 한참을 더 산 것 같은 느낌의 이 즈음에서야, 세상만사를 잘 꿰어서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야말로 새삼, 헛된 기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온갖 지력을 끌어다 써야 하는 것이었구나,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명상을 진지하게 시도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분별있고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지라도, 알고 보면 대부분 사고 과정이 이리저리 날뛰는 서커스의 원숭이처럼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생각들로 이뤄져 있다는 걸 말입니다. 많은 이가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마음이 금세 고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은 그럴 수 있지만 정말 잠깐뿐입니다. 죽은 사람의 마음만이 고요할 수 있지요. 살아 숨 쉬는 한 우리는 두뇌를 쓰기 마련인데, 본래 어떤 안을 구상하고 그 안을 다른 안과 비교해서 새로운 안을 재구성한 뒤 그것에 또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두뇌의 일이니까요.” (pp.52~53)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이치에 통달하기 위해 문사철의 잡다한 지식을 끌어모으는 일 보다는 작은 선의를 키우는 일에 좀더 전력을 기울이자 마음먹고 있다. 정연하게 해석하는 힘 대신 부조리 앞에서 인내하는 힘을 가지려 애쓰는 중이다. 저자의 스승 중 한 명인 아잔 수시토 스님이 “나티코, 나티코. 혼돈은 자네를 뒤흔들지 모르지만 질서는 자네를 죽일 수 있다네.”라고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p.130)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이 말을 저자가 아니라, 아잔 자야사로 (아잔은 일정 시간 이상 수련을 진행한 승려를 호명하는 데 사용하는 존칭 같은 것이다) 스님이 사용한 것으로 등장한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도리가 없는 현실 안에서, 자기 합리화의 언설이 아니라 진정 내 말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아직도 옛날처럼 사는 분이 있군요! 뭐 좀 도와드릴까요? 잠깐이라도 우리 차로 가실래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내내 걸어가기로 다짐했거든요.”

  “그럼 돈이라도 조금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숲속 승려는 돈을 사용하지 않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뭔가 드릴 게 있지 않을까요? 음식이라도 드릴까요?”

  “그것도 괜찮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숲속 사원의 전통에 따라 하루에 한 끼만을 먹는데, 아침에 이미 먹었거든요.”

  “그래도 스님에게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정 그러시다면··· 펩시면 될 것 같군요.”』 (pp.158~159)


  책을 쓴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스웨덴인이며 이십대에 이미 잘 나가는 다국적기업의 임원직에 올랐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고 태국 북부의 숲속 사원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시작한다. 숲속 사원은 외국인 승려를 위한 도량 같은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의 승려 생활을 어느 날 문득 그만둔다. 그리고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와 여러 명상 수업을 이끄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적, 초월적 성장은 심리적인 대응 전략을 익힌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정 성장하려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번뇌에서 멀어지고, 설사 번뇌에 빠지더라도 금세 벗어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물론 살아가며 고민과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번뇌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은 적절한 목표가 아닙니다.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죽은 사람뿐입니다.” (p.171)


  혹여 선문답 같은 내용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리라 의심하지 않으면 좋겠다. 책의 내용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분개할만한 상황으로 차고 넘치는 시공간 안에서는 더욱 쓸모를 가질만한 자기 강화 방안들이 많다. 나는 간혹 분노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지인에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힘이 가지는 소모와 허무의 속성을 이야기한 바 있는데, 같은 말이 등장하여 놀라기도 하였다. 나는 어쨌든 선의의 힘을 믿어보고자 한다.


  “인간만이 자신과 맞지 않는 다른 존재를 성가시다고 여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여길 때 우리는 엄청난 기운을 소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이 줄줄 흘러나갈 구멍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p.93)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 박미경 역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I May Be Wrong) / 다산초당 / 311쪽 / 20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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