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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Sep 07. 2024

임종업 《한국의 책쟁이들》

책의 머슴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독서 욕구는 끊이지 않으니...

  어느 정도 책이 모일 때까지는 간간히 책의 숫자를 헤아려 보고는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포기하게 된다. 어쩌면 그 시기가 그동안 모은 책이 1천 권 즈음에 도착할 때가 아니었나 싶다. 정기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에는 주로 동대문의 책 도매상에서 다량으로 책을 구입하였다. 서너 개에 불과하던 책장은 계속 늘어갔다. 결혼을 하고 아내의 책과 나의 책이 합방을 하게 되면서 우리의 책장은 다시 한 번 불쑥 자라났다. 그렇게 현재의 집으로 이사를 올 때 아내가 내게 요구한 것은 딱 하나, 좁은 집에서도 가지런히 책을 보관할 수 있도록 슬라이드가 장치된 이중 구조의 책장을 구비하자는 것이었고, 모든 것이 미안하기만 하였던 나는 그 요구만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책은 니코틴과 같아서 한두 번 재미로 시작해 중독된다. 1천 권에 이르면 제법 모았다고 생각하지만, 5천 권에 이르면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욕심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면 책들은 스스로 방향을 잡아간다. 목표가 부여된 순간부터 컬렉션에는 품위가 생겨난다. 처음에는 그저 즐겁고 여유 있는 취미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격정과 맹렬한 욕망으로 타오른다.”


  책을 읽는 동안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숫자를 헤아려 볼까 엉덩이를 들썩였으나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이삿짐을 정리하던 그 시기의 카운트가 5천에 가까웠으니 아마도 지금은 그 숫자를 넘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나의 욕심의 본질은 책탐이라기보다는 독서탐에 가까운 것 같으니, 5천 권에 이른 도서량을 짐작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탐이 전혀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그저 이번에 읽은 책 속에 등장하는 책쟁이들에 비하여 그렇다는 말이다. 나 또한 내 소유의 책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넘기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될 책들 또한 그예 사는 형태로 독서를 하고 있으니...)


  사실 나와 아내는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고 어루만지며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책을 소유함으로써 채워지는 바로 그 욕망에 허덕이는 편은 아니다. 물론 예전부터 쭈욱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나의 책장이 어떤 식으로든 훼손된다면, 하고 잠시 상상을 하였는데, 상상만으로도 꽤 큰 상실감이 생겼다.)


  “그는 책의 주인이 아니다. 책이 그의 주인이다. 여씨의 돈과 시간과 정력이 집중되어 책의 덩치가 커지면서 책들은 그를 머슴으로 부리기 시작했다. 쌓인 책이 원하는 방향대로 여씨는 책을 사들였고, 넓은 집으로 이사해 책을 펼치고 자신은 골방으로 만족했다. 이자에 이자를 내면서 책 호사를 시키려다 결국은 손을 들었고 책들은 창고에 한동안 갇혔다. 하지만 책들은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견딜 수 없는 머슴 여씨는 다시 공간을 마련했다. 이제 책들은 여씨를 부려 여름 한철 호사를 하려 하고 있다. 늙은 머슴 여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넓은 공간에 에어컨을 씽씽 틀어댈 것이다.”


  오히려 나는 책 속의 여씨처럼 책이 나의 주인이 되는 지경을 항상 경계한다. 나는 책을 주인삼아 머슴 노릇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순간 현재 수준의 책탐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하리라...)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고, 나를 힘겹게 하는 것은 읽지 못한 채 뒤로 밀리는 책을 바라보는 순간이 길어지는 현재의 상황을 생각할 때이다. 


  그렇지만 장담하건대 어느 때고 분명히 그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아마도 책을 구매하는 속도 또한 점차 조절 가능해 지리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속도도 조절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낙천적이니 오늘 못 읽으면 내일 읽고, 내일 못 읽으면 그 다음 날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어느 순간 나의 경제적 능력이 책 구매의 속도를 현저히 늦추게 될 때, 그때를 생각한다면 지금은 조금 속도를 더 내어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어제도 서른 권 가량의 책이 도착했다. 



임종업 / 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 청림출판 / 337쪽 / 200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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