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늠되지 않는 어두움의 수렁 속, 연애라고 이름 붙이기에 염치가 없는..
오랜만에 연애 이야기나 읽으면서 복잡한 세상사로부터 벗어나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지만, 아뿔싸... 이건 뭐 근래에 보기 드문 칙칙하기 그지 없고 팍팍하면서 비참하고 야비한 연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출구 없는 우리들 소시민의 막다른 골목을 비추는 삶의 이야기이며, 더불어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거들먹거리며 이뤄지는 추잡하기 이를 데 없고 역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이다.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일단 이야기의 중심축에는 수진과 장우가 있다. 두 자녀를 두고 살면서 십여 년이 흐른 후 남편 상곤과 늦깎이 결혼을 한 수진, 하지만 그 자리에 우연찮게 참석한 장우가 그녀의 삶에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 중소기업에서 힘겹게 밥벌이를 하는 상곤과의 부부 생활이 서울 시내에 여러 채의 빌딩을 가지고 있는 장우와의 짜릿한 연애에 내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 그렇다. 액자 속의 일이었다. 그가 만든 액자, 그녀가 만든 액자, 그것이 거대한 대리석의 거실에 걸려 있건 뒷골목 초라한 미용실 벽에 걸려 있건 다를 게 없었다. 그가 만든 액자와 그녀가 만든 액자는 과연 같기는 한 것일까. 같은 것이라 믿지만 전혀 딴판의 액자 속에 그들은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힘겹지만 아직까지는 수진도 장우도 그 액자를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불가능하다. 모텔에서의 만남은 장우가 마련한 오피스텔에서의 만남으로, 그리고 살림집을 닮은 아파트에서의 만남으로 발전하고 수진은 남편과의 불화 끝에 집을 나오지만, 결국 장우가 마련해준 아파트로부터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를 좀더 어린 연숙이 대신한다.
“...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성되고 제작된다...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성되고 제작될 뿐이다...”
장우의 친구이자 제부이기도 한 두영이 관리하는 건물에 거주하던 연숙은 같은 건물에 살던 영화 감독 대일과의 허무한 연애를 정리하고, 두영의 거간을 받아들여 장우의 정부 자리를 꿰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속된 세계는 남녀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니, 수진의 남편 상곤은 자신들을 하청업체의 직원으로 만들려는 사업주에 대항한 투쟁을 계속하고, 그 사이 나락으로 떨어진 수진의 현실을 확인한 후에 장우의 별장으로 찾아든다.
“... 아예 노예를 만들어라. 노예를 만들어서 데리고 살아. 정말이다. 노예를 만들어. 우릴 노예로 만들어줘.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살 수 있을 거 아니냐. 노예가 아닌데 노예처럼 살려니까 정말 힘들다. 힘든 것도 모르는 노예로 만들어줘. 그러면 너희도 우리도 골치 썩을 일 없을 거 아니냐.”
도대체 뭘 믿고 <연애, 하는 날>이라는 제목을 택했을까 싶게 소설은 어둡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연애라고 지칭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소설은 주인공인 수진과 장우 보다는 사회적 약자인 한 남자 상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연애를 하는 날이 모두 기쁘고 익사이팅 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 수긍을 못할 것도 없지만, 이 어두운 연애를 읽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다.
최인석 / 연애, 하는 날 / 문예중앙 / 406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