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도 쿨하게 인정하고 있는 이 '자의식 과잉'의 한껏 허황된..
정영문의 소설은 내게 과거의 이인성이나 최수철, 최근의 정찬과 비슷한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전통적인 소설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사람들은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방벽을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간지나 이상문학상 수상집 등에서 간혹 읽는 단편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장편 소설을 (그가 번역한 레이몬드 카버나 존 파울즈의 소설은 읽은 경험이 있지만) 끝까지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실토해야겠다.
아예 살 엄두도 내지 않았던 그의 소설을 이번에 구입한 것은 과거 여자 친구와 그녀의 멕시코계 남자 친구 운운하는 첫부분에서 그간의 작가가 보여주던 것과는 조금 다른 가벼움이 얼핏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작성한 글이라는 실토와 함께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고 자신의 글쓰기를 폄훼하고 있는 모양이 더욱 독자인 나를 자극한 것이다.
“... 내가 재미없게 생각하는 것들을 들면, 모든 종류의 소음...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 상식적인 것, 뻔한 수작(을 부리는 사람)... 그리고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은....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자유자재로 말들을 갖고 놀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 아무것도 아닌 뭔가에 대해 혼자만의 이론을 펼치는 것...”
더불어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은 재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 글이기도 한데, 대략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을 싫어하고,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을 좋아한다는 위의 문장이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재미라는 것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가 느끼는 재미의 대부분은, 이렇게 (읽기가 녹녹치 않은 작가군으로 분류되는) 작가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재미에 다름 아니다.
“...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어디로 나아가도 좋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파생하고 이탈해 그것들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소설이다.”
사실 작가의 이번 소설은 그러니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이 보통 수상집에 한 편씩 덧붙이고는 하는, 자신의 글쓰기 작업에 빗대어 함께 싣는 자선작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허황되고 무작위로 뽑혀진 것과 같은 상황과 사람과 동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소설을 읽고 있자면 소설가 정영문이 지향하는 바 혹은 지양하는 바로서의 소설 내지는 글쓰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라는 엑기스만을 쭈욱 잡아 뽑을 수 있다.
“... 나 자신이 세상의 누구와도 더 이상 관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래서 관계가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갈등을 빚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실제 삶 속에서도 관계가 문제가 되는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이 어떤 불구 상태인 것처럼 여겨졌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글이 씌여진 장소가 샌프란시스코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도 우리나라 사회의 일반적인 삶에서 무척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듯한, 그리고 그러한 나라에서 그러한 나라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불구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던 듯한 작가는 그러한 '지루함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서의 소설을 작성하고 있다, 고 느껴질 뿐 아니라 스스로도 누차에 걸쳐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이 소설에는 뜬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생각에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생각과 말의 어지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작위의 세계’라고 밝히면서 그간의 자신의 이런저런 작업들 혹은 그러한 작업들의 대상으로 삼았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폄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폄훼된 작가의 창작 작업은 위선이 판치는 문명계를 향하여 보내는 위악이라는 이름의 자연계의 반란처럼도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 또한 갖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하물며 자의식의 과잉이라는 천형을 달고 살아야 하는 (작가 자신이 쿨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소설가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한 편의 소설로 작가를 모두 들여다본 것처럼 너절하게 글을 쓰는 나 자신에 대해 미덥지 못한 마음을 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여하튼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거나 깨뜨리면서 창작 작업을 (고충 속에서도) 무난히 해내는 작가들에게는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정영문 / 어떤 작위의 세계 / 문학과지성사 / 294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