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몰입 속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스산하기 그지없는 한강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원인조차 알 수 없는 그녀의 침묵, 정체 파악의 의무에 앞서 오히려 그 소설 속 침묵에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암울함을 독자에게 전가하는 한강 특유의 음습함으로 역시 가득하다.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면 간혹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을 등치하고자 하는 엉뚱한 욕망에 시달리고는 하는데, 이번에도 그러한 열망이 있어 어쩐지 독서 행위 자체가 조금 들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다시 왔으므로, 그녀는 그 일들을 모두 중단했다... 그것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 물론 그녀는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수년 전에 이혼했고, 세 차례의 소송 끝에 마침내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었으며, 그 아이가 전남편의 집으로 들어간 지 오 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말을 잃었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불어 수업 시간 갑자기 그 잃어버렸던 말을 되찾았고, 지금까지 온전하고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잊고 있었던 바로 그 순간이 다시금 찾아왔다. 그녀는 말을 잃었고, 그동안 자신이 사회적으로 획득해온 모든 것들을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내려 놓고 물러나야 하는 처지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녀는 희랍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과거 그녀가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갑작스레 말을 되찾았듯, 이제 그녀는 그녀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인 희랍어에 그러한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희랍어 시간을 통하여 말의 회복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언제 가능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희랍어를 가르치는 그 남자가 그녀의 침묵을 바라보고 있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소설에는 분명 그녀의 반대편에 그가 있지만 그녀에게 잔뜩 몰입한 독자인 내게 그의 존재는 희미하다. 사실 어린 시절 이미 눈을 잃게 되리라는 병증을 확인하였고, 그 진행의 속도만을 알 수 없을 뿐인 그는 시력이 사라지는 중이다. 시력이 사라져가는 중인 그 앞에는 말을 잃은 그녀가 있는데, 독자인 나는 그의 자리에 나를 세우고 그를 대신하여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소설 속 열일곱 살의 어린 그가 독일의 병원에서 사랑하게 되었던 병원장의 딸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의 현재와 과거를 읽을 때는 집중하지만,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읽을 때는 자꾸 낙오하는 독자가 된다. 회복되지 못하고 점점 상실되어갈 수밖에 없는 그의 눈의 상황은 곧바로 독자인 나의 상황이 되고, 나는 그렇게 자꾸 희미해져가는 시선을 그녀의 회복되지 못하는 말을 향한 몰입으로 바꾸고자 한다.
“...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 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 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조금은 힘겹게 소설을 읽었다. 자꾸 초점을 잃어버리는 눈을 활자에 집중시켜야 하는 물리적 피로감도 한 몫을 했다. 어쩌면 그녀가 희랍어 공부를 통하여 말을 회복하려고 하듯, 나는 검은 활자에 초점을 맞추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원상 복구 될 수도 있다는 엉뚱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소설 속 그녀와 그가 드디어 한 공간에 머물게 되는 순간에도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나는 지극히 사적으로 한강의 소설을 읽고 있으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는 중이다.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한강 / 희랍어 시간 / 문학동네 / 193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