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명의 작가에 대한 감응의 보고서와 한 명의 인물을 향한 우려의 보고
오랜만에 비평서를 읽으려니 조금 피곤해졌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그것봐라 맨날 소설만 읽을 때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라며 오히려 고소해 한다. 책은 뉴욕을 대표하는 여성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수전 손택이 1972년부터 1980년 사이에 작성한 일곱 명의 작가들에 대한 비평 모음이다. 원제인 Under the Sign of Saturn 토성의 영향 아래, 라는 제목은 발터 벤야민에 대한 분석의 글에 달았는데, 이를 전체 책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책에 실린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사회비평가인 폴 굿맨, 나치의 국가사회당 대회에 관한 영화인 <의지의 승리>와 나치 치하에서 벌어진 올림픽 기록 영화인 <올림피아>의 감독인 레니 리펜슈탈, 유대교 독일인으로 문화비평가이자 철학자 그리고 좌파 아웃사이더였던 발터 벤야민, <히틀러, 독일 영화>를 통하여 궁극의 풍자를 보여주었던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였으며 비평가였던 롤랑 바르트, 불가리아 태생의 유태인 작가로 영국에서 활동하였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엘리아스 카네티, 프랑스의 시인이자 연극 연출가로 잔혹극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앙토냉 아르토까지...
작가가 감응을 하거나 호응을 하고 있는 여섯 명의 작가, 그리고 과거의 전력에 대한 세탁 작업을 감행하고 있어 우려를 표하는 한 명의 작가인 레니 리펜슈탈까지 모두 일곱 명을 그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어떤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은 아니며, 작가의 타계 소식 혹은 작가의 전시 소식을 접한 이후 갖게 된 의견 표명의 의지가 반영된 글들이라고 보여진다.
“벤야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기질을 모두 자신의 주요 연구과제에 투사했으며, 그의 기질이 그의 글쓰기의 주제를 결정했다. 17세기 바로크극(‘음울한 나태’의 여러 국면을 극화한 극이다)이나 그가 가장 뛰어나게 다룬 작가들 - 보들레르, 프루스트, 카프카, 칼 크라우스 등의 주제에서 벤야민이 본 것이 바로 그 우울함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어떤 상황에 대한 분석에 그치고 있지는 않으며 거론하는 작가들의 모든 작품 활동과 그것에 깔려 있는 의식의 기저까지를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벤야민의 경우 그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경향, 예를 들어 ‘명백해 보이는 해석에 저항하는’ 것과 같은 경향의 경우 아마도 작가에게도 어떤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여진다. (책의 전체 제목을 벤야민에 대한 분석의 글의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고, 번역된 제목인 우울한 열정에서도 벤야민을 떠올리게 된다.)
“... 지버베르크는 히틀러 이후에도 살아있는 일종의 히틀러적 본성, 현대 문화에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 현재를 가득 채우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변화무쌍한 악의 원칙을 환기시킨다...”
이와 함께 히틀러 시절 - 비록 예술 형식적으로는 훌륭하였으나 나치즘의 홍보물로 볼 수밖에 없었던 -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지만 현재 그러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 리펜슈탈과 추상적이고도 우화적이며 초현실주의적인 자신의 영화를 통하여 - <히틀러, 독일 영화>를 비롯한 일련의 독일 영화 3부작 - 히틀러 그 이후의 시대에 대한 비판까지 서슴지 않는 지버베르크를 한 책에 삽입함으로써 (비교 아닌) 비교를 하는 구성도 재미있다.
“그는 극도로 정중하고, 약간 탈세속적이고, 쾌활했다. 그는 폭력을 혐오했다. 언제나 슬픈 빛을 띤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쾌락에 관한 그의 말 전체에 무언가 슬픔이 있다. 『사랑의 단상』은 무척 슬픈 책이다. 그러나 그는 황홀경을 알고 그걸 찬미하고자 했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또한 죽음을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쓰지 못한 책의 목적은, 삶을 찬미하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가 하면 예순 네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물론 그의 죽음을 접한 이후 쓴 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더불어 그나마 읽은 롤랑 바르트의 책인 <사랑의 단상>에 대한 단상이 삽입되어 있으니 이 또한 반갑다) 또한 잔혹극의 창시자 혹은 옹호자라고 할 수 있는 아르토에 대해서도 꽤 후한 점수를 주고 있으며, 그에 대해서 일곱 편의 글 중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앙토냉 아르토의 삶은 문학적 모더니즘의 영웅적 시기의 마지막 위대한 본보기로서, 이러한 가치 재평가 과정을 적나라하게 요약해 보여준다. 작품에서나, 삶에서나, 아르토는 실패했다... 이 전체는 산산 조각난 스스로의 팔다리를 잘라낸 몸, 파편의 방대한 모음을 이룬다. 그가 남긴 것은 완성된 예술 작품이 아니라 독특한 존재, 모종의 시학, 사고의 미학, 문화의 신학, 수난의 현상학인 것이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그 의식의 흐름까지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것이 수전 손택의 비평법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그녀 또한 언제나 행동하는 지성이 되기를 자처하였고, 베트남전 참전 반대나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 등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아르토를 평하는 것에 빗대자면 ‘독특하고, 사로잡히고, 무력하고, 잔혹하게 지적인 의식의 유기적인 일부’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위대하고 대담한 사람 중 하나’인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수전 손택 / 홍한별 역 / 우울한 열정 (Under the Sign of Saturn) / 시울 / 262쪽 / 2005, 2009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