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뉘엘 카레르 《나 아닌 다른 삶》

조급함으로 책장을 덮지 않는다면 해일과도 같은 감동을 경험할 수 있을 지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 책의 3분의 1 지점을 읽을 때 까지도 나는 속으로 내내 투덜거렸다. 그리고 갈등했다. 계속 읽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책을 덮고 다른 책을 꺼낼 것인가. 책의 앞 부분에서는 스리랑카의 휴양지에서 해일로 인해 어린 딸을 잃은 부부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이들을 근거리에서 살피는 나와 아내 엘렌의 이야기가 별다른 임펙트도 없이 진행이 되더니, 갑자기 파리로 돌아와서는 나의 처제 그러니까 엘렌의 여동생이 암에 걸려 죽어가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두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쥘리에트라는 이름 하나 뿐이다.


그리고 결국 스리랑카의 어린 쥘리에트가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이 된 것처럼, 파리의 아직 젊은 쥘리에트 또한 암 투병 끝에 운명을 달리한다. 어린 쥘리에트가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 그리고 외할아버지를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난 것처럼, 파리의 쥘리에트는 남편 파트리스와 클라라와 아멜리와 디안이라는 어린 세 딸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나는 쥘리에트와 함께 소법원의 판사로 일하였던 동료 판사 에티엔에게서 쥘레에트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 지난봄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스리랑카에서의 기억들을 다시 반추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차에 에티엔과 파트리스, 쥘리에트, 소비자 보호법에 관한 메모들을 다시 뒤적였다. 결국 나는 3년 전에 구상한 책으로 다시 돌아왔고, 포기한 지 3년만에 집필을 마쳤다.”


도통 그 진행에 대한 힌트가 없으니 나중까지 잘 몰랐지만, 사실 소설은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 작가인 엠마뉘엘 카레르는 실제로 해일로 인한 스리랑카에서의 죽음과 처제의 죽음을 목격하였으며,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실제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소설의 끄트머리 즈음에 가서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그 그 즈음이 되어서야 왜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나’라는 작가가 무책임한 기록자의 역할만으로 자신을 한정지으면서 소극적이기만 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소설은 작고 짧게 다루어진 어린 쥘리에트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젊은 쥘리에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들의 삶에 내재해 있는 불행의 조건들 그러니까 죽음, 질병, 장애 (더불어 소법원의 판사였던 쥘리에트가 다룬 많은 사안들인 빈곤의 문제까지) 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불행의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통하여 소설 속의 내가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확인하게 되는 행복의 조건들 그러니까 사랑, 가족애, 우정 (그리고 지방 도시 소법원 판사들이 쟁취하게 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의 연대까지) 등이 그러한 불행의 조건들을 뛰어넘는 과정 또한 살필 수 있다.


“... 내 삶은 성공한 삶은 아니었어, 라고 말했을 거야... 내가 죽는다는 말을 해일을 경험하기 이전에 들었다면, 난 그렇게 대답했을 거야. 그런데, 해일을 경험하고 나서 나는 당신을 선택했어. 우린 서로를 선택했어, 이제 달라졌어. 당신이 있어, 내 곁에. 만약 내가 내일 죽더라도, 나도 쥘리에트처럼 내 삶이 성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가슴이 알싸해지는 슬픔과 동시에 푸근한 안도감 또한 느끼게 된다. 조급함으로 책장을 덮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묵직한 감동이다. 모든 떠난 자들이 남긴 유산은 아마도 남아 있는 자들의 현재를 통해서만 그 진가가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린 쥘리에트의 부모 그리고 젊은 쥘리에트의 남편과 그 딸들의 현재가 다행스럽다. 소설은 바로 그 다행스러운 현재를 기록하면서 스스로에게 다행이다, 라고 속삭이는 작가가 우리들 현재의 다행스러움을 인지하라고 부추기는 모양을 띠고 있다. 읽어볼만하다.



엠마뉘엘 카레르 / 전미연 역 / 나 아닌 다른 삶 (D'autres vies que la mienne) / 열린책들 / 374쪽 / 201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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