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클라투 행성 지구 주재 특파원'이 쓴 몇 개의 아주 독특한 단편들...

by 우주에부는바람

무척 관심이 가는 작가의 발견이다. 물론 그의 단편소설들은 어떤 것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만 또 다른 것들은 그다지 감응을 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의 소설에 기복이 있다기 보다는, 아직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젊은 작가이기 때문인 듯하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그는 2008년 마흔 살의 나이에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였으니 젊은 작가라고 부르기에 애매하다.) 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클라투 행성 지구 주재 특파원’으로 규정하였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1925년 3월 22일 베를린에서 훝날 시인이 되는 마이클 햄버거가 태어난다. 1968년 영국의 출판사 펭귄에서 <펭귄 현대 시인 서닙>의 편집을 담당하던 이본 마멜은 제14권에 들어갈 시인 중 한 명으로 마이클 햄버거를 추천받는다. 출판된 후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 책은 동네 맥도날드와 경쟁 관계에 있던 한 스낵바 주인 마틴 커닝스는 아들을 시켜 햄버거 관련 책을 사오도록 시킨다. 그리고 그저 이름에 햄버거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이클 햄버거의 책 또한 딸려 온다. 이 책은 커닝스 주니어가 미8군에 배속받으면서 1988년 한국에 들어오게 되고, 그가 3년 뒤 필리핀으로 떠나던 날 실수로 한국에 남게 되며, 이태원의 헌책방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15년간 헌책방에 머물다가 2006년 어느 날 헌책방을 찾은 C기획 김경주 부팀장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마침 맥도날드의 마케팅 프리젠테이션을 작성하던 김경주는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시와 햄버거의 조합이라는 절묘한 상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는 ‘마이클 버거’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 햄버거의 역사에대한 짧은 요약에서 언급했듯이 아무래도 인간에게 세계는 사랑의 기억에 대한 애틋한 연민이나 가족에 대한 이해심, 혹은 시적 상상력과 진보에 대한 점진적인 확신이 적절하게 버무려지면서 조금씩 사랑스러워지는 법인 모양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우주도 있을 터이지만 말이다.”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

작가의 등단작이다. 종이 냅킨이 언제부터 사용이 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인 동시에 황무지의 시인 T.S.엘리엇에게 영향을 미쳤던 설리번 양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감한 반전의 시도... “... 우리의 문명은 상징보다는 항상 재생하는 행동에 의해 종말을 유예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종이 냅킨 혹은 조이 냅킨 접기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라고 부른다.” 라고 선언하는 2133년 국제 T.S.엘리엇 학회 연례 총회 개회사로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이 압권이다. 허구와 실재를 마구잡이로 뒤섞는 작가의 총기가 볼만하다.


「옛날 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

S를 사로잡기 위하여 초능력을 배우고자 하는 현의 노력은 한 종교 단체의 영성 수련 과정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1단계의 통과 시험에서 실패하고 만다. 결국 S가 보여준 여러 가지 미심쩍은 반응의 정체는 나중에 밝혀지고 이제 S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물에 사로잡혀 중력을 따라 수직 방향으로 자유낙하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건 너를 알기 전, 너의 앙상한 가슴을 알기 전, 너의 숨죽인 호흡을 알기 전... 하지만 현은 이제 알게 되었다. 어쩌면 사랑은 존재의 본질에 어울리는 참다운 이름을 찾아 미세한 부유물처럼 존재와 존재 사이의 빈 공간을 떠도는 브라운운동일지도.”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

“... 마치 로르샤흐의 카드 열 장이 한 인간의 심연에 그물을 던져 영혼의 깊은 곳에 부유하는 심상을 건져 올리듯, 사물이나 정신의 얼룩은 우리가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참조해야 할 교통표지판과 같은 거야. 정신이 쇠약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인 셈이지.” 의식의 심연을 파악하기 위한 로르샤흐 테스트라는 형식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밝혀지는 나의 존재의 본질 그리고 어디에선가 나에게로 그리고 나를 통하여 또 다른 무엇으로 전이되는, 우주를 떠도는 의식의 흐름들...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

보다 높은 등급의 생명체,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유형을 오는 행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지구... 자신의 생명 살해 행위에 대한 유형의 의미로 지구의 한 평원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던 노시인은 이제 유형이 끝이 나지만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는 소울마스터에게 어려운 결정을 알리게 된다.


「돌고래 왈츠」.

“... 고향 행성에서는... 하나의 감각 예술을 다른 에술 장르로 번역하는 일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지구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축구의 한 장면을 한 곡의 록 음악으로, 한 곡의 록 음악을 한 장의 석판화로, 한 장의 석판화를 한 편의 수중발레로, 그리고 한 편의 수중발레를 하나의 문신으로 자신의 피부에 새겨 넣는 것, 이것이 내가 고향 행성에서 관심을 갖던 일이었다.” 케이블 티비 홈쇼핑 채널의 콜 센터에서 고객 상담 전화를 받던 내가 어째서 돌고래 쇼의 중간으로 뛰어들어 지금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가에 대한 일종의 범우주적 변명 같다고나 할까.


「초설행」.

앞선 단편들과는 많이 다르다. 조선 초 사육신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과 맞물린 김맹규와 그의 아들 김우겸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김우겸이 자신을 받아들여준 의형제 조지서의 동생 조설영과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각광을 받는 조선시대판 로맨스라고 볼 수 있는 사극 로맨스들의 조금 답답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본격적인 SF물이라기 보다는 경계 문학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명백하게 허구인 것들에게 아주 명백해 보이는 듯한 현실의 외피를 입히는 재주가 돋보인다. 정신없이 소설을 읽다보면 외계 특파원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에 수긍이 가는 순간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아직은 들쑥날쑥 하지만 지구인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자신만의 색깔을 보다 분명하게 획득하는 날이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조현 /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 민음사 / 222쪽 / 20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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