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해 본 적이 없는 이 가족의 구성원이 사는 법...
“이제부터 내가 옮겨 쓰는 글은 1939년 중반에 알멘드랄레호의 어느 약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누가 그 원고를 그곳에 가져다 놓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만, 나는 그때부터 그 원고를 독해하고 정리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 왔다... 지금부터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소개할 이 작품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단지 필사만 한 것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p.17, <옮겨 쓴 이의 메모> 중)
“설명을 좀 해야겠군요. 불행하게도 내 기억이 범상치 않은 저주받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고, 또 적잖은 속죄가 될 이런 공개적인 고백을 통해 할 수 있는 만큼 양심의 부담을 덜고 싶기에, 내 삶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p.19, <원고 발송을 알리는 편지> 중)
소설이 시작되기에 앞서 ’옮겨 쓴 이의 메모‘가 먼저 등장한다. 여기에서 ’나‘는 작가인 ’카멜라 호세 셀라‘일 터이다. 그리고 곧바로 ’원고 발송을 알리는 편지‘가 나오는데 여기서 ’나‘는 바로 ’파스쿠알 두아르테‘이다. 그러니까 스페인의 실존 인물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자신의 글을 누군가에게 보냈고, ’카멜라 호세 셀라‘는 그 글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고 정리하였을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 로사리오는 자라서 소녀티가 났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아이는 도마뱀보다 더 영악했습니다. 우리 식구들 중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골통을 제대로 굴리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동생은 곧 집에서 여왕처럼 행세헸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우리를 갖고 놀았습니다. 그녀의 천성이 착했더라면 대단한 선행들을 많이 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선의를 가짐으로써 튀는 걸 원치 않으셨기에 다른 쪽으로 용도를 바꾸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곧 동생이 바보는 아니지만, 차라리 바보였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p.44)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1900년대 초 스페인의 한 시골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엄마가 딸을 낳자 혁대로 팰 정도로 성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엄마를 가여워하기도 어려운 것이 그녀 또한 욕을 입에 달고 살았고 물을 무서워해서 어지간하여서는 씻지 않는 선천적으로 더러운 인물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여동생 로사리오가 가세하게 되니 도저히 ’화목한 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다. (이후 씨가 다른 마리오라는 동생이 태어났으나 어려서 기름 항아리통에 빠져서 죽었다.)
“어린 파스쿠알이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세 여자가 내 주변에 맴돌았습니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든지 그들과 이어져 있었지만, 때로 그들이 스쳐 지나가는 초면의 사람인 듯 너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지요. 그리고 그 세 여자들 중 누구도, 정말입니다. 마음이나 행동으로서 내게서 자식을 잃은 고통을 견딜 수 있게끔 해 주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내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려고 의기투합한 듯했지요. 그 세 여자는 바로 내 마누라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입니다.” (p.107)
이러한 가족의 구성원인 파스쿠알 또한 다른 가족 구성원에 뒤지지 않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롤라가 임신을 하고 결혼을 결심하면서 어떤 기회가 주어지기는 한다. 첫 번쩨 아이를 유산으로 잃은 다음, 두 번째 임신으로 새로운 아이를 얻게 된 것이다. 파스쿠알은 그 아이를 자신과 같은 파스쿠알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애지중지하였으나 그 아이마저 십일 개월 때에 잃고 만다. 그에게서 어떤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 크건 작건 내 서글픈 인생의 자잘한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게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보상이라도 하듯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운 순간도 있지요. 그것이 기쁨 중에서도 가장 기분 좋은 이유는 아마도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겁니다. 마치 모르는 사람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하듯이 말입니다. 만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내가 살아가려고 할 삶과 살아온 지난 과거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테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런 잘못이 계속되는 건 피해야 하는데, 나는 감옥에 갇혀 있는 덕이기도 하지만 그 잘못을 꽤 잘 피해가고 있지요...” (p.124)
이후 그는 롤라를 임신시킨 로사리오의 남편을 죽여서, 그 다음에는 자신의 모친을 살해하여서, 마지막으로는 동네의 유지인 백작을 살해하여서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의 초고가 될만한 원고를 감옥 안에서 작성하게 된다. 파스쿠알은 결국 사형을 당하였는데, 그 사이 이렇게 작성한 원고를 자신이 죽인 백작의 다른 친척에게 보냈고, 우리는 이를 통해 파스쿠알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 더 지나 길 중간쯤에 이르니 오솔길 오른편에 묘지가 보였습니다. 내가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 자리에, 여전히 거무스름한 벽돌담에 둘러싸여서 말입니다. 전혀 변한 게 없는 높은 사이프러스 나뭇가지 사이에서 부엉이 한 마리가 울고 있었죠. 그 묘지에서 내 아버지는 울분을, 마리오는 천진함을, 내 마누라는 방종을, 그리고 싸가지는 오만함을 묻어 두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또 유산된 아기와 꼬마 파스쿠알, 내 두 아이들의 유해가 썩어 가고 있는 곳이기도 했지요...” (p.157)
소설의 형식으로 보자면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얼마전 읽은 《시식시종》과 판박이다. 《시식시종》은 우고 디폰테라는 인물의 원고를 피터 엘블링이 우연히 발견하여 번역 후 책으로 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니,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우고 디폰테의 역할을 작가인 카밀로 호세 셀라가 피터 엘블링처럼 우연한 발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카밀로 호세 셀라 Camilo Jose Cela / 정동섭 역 /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La familia de Pascual Duarte) / 민음사 / 209쪽 / 2009, 2018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