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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 《문화편력기》

두서없이 펼친 페이지, 어디로든 떠나고 돌아올 수 있는 세계 문화 기행.

by 우주에부는바람

“...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감에 따라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한밤중에 침대에 기어 들어갈 무렵, 그것은 정점에 달한다. 딱 현실 세계에서 손을 떼고 있는 시간대다. 마음 놓고 별세계에서 노닐 수 있다... 아침의 복닥거리는 통근 전철 안에서 독서가 어울리는 것은 아마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재미있는 책은 불쾌한 현실을 의식에서 쫓아내준다.”


누군가가 왜 책을 읽으시냐고 물으신다면 나도 이렇게 이야기 해야겠다. ‘재미있는 책은 불쾌한 현실을 의식에서 쫓아내준다’, 라고... 극강의 독서력을 가지고 있는 (하지만 이제 고인이시라니...) 요네하라 마리 여사와 비교할 것이 못되게, 나의 경우 시계바늘이 열두 시를 넘기고 나서야 슬슬 독서에 대한 욕구가 솟구치기 시작하여, 한 시를 넘어가는 시점이 되면 최고점을 찍는다. 그렇게 시작된 책 읽기는 좌에서 우로 굴러다니면서 지속되다 새벽 네 시 즈음이 되어서야 정리가 되고는 한다.


물론 아직은 내공이 부족한 탓인지, 독서의 와중에도 끊임없이 ‘불쾌한 현실’이 들락거린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이미 지나온 페이지로 유턴을 해야 하기도 하고, 잠시 책을 접고 천장을 향한 채 눈을 꿈벅거린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사고의 회로 바깥으로 밀어내버리자, 라고 외치고 나서 다시 책을 펼쳐 든다. 이럴 때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책을 들고 있다면 꽤 다행이다. ‘재미있는’ 책이어야 이런 사고의 전환이 가능하니 말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야생 버섯 따위는 먹지 말고 상품화된 인공재배 버슷으로 만족하면 좋을 것이다. 요컨대 먹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나 같은 경우는 ‘맛없는 버섯=무난한 인생’ ‘맛있는 버섯=생명의 위험’이라는 철학적인 양자택일에 놓이게 된다... 이 선택에는 인생관, 쾌락관이 반영된다... 당연히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 버섯 사냥을 갈 때는 『독살방법사전』과 돋보기를 반드시 휴대하지만, 겉모양만으로는 분간하기가 어렵지 않다...”


일관된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서 현실이 주는 불쾌함으로부터 벗어나기에 적당하다. 잠시 딴 생각을 하다 제자리로 돌아와도 앞의 내용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앞으로부터 차근차근 읽지 않아도 좋다. 두서없이 문득 연 페이지의 내용에서 작가의 인생관이나 쾌락관의 일단을 확인하며 살짝 웃을 수도 있다. 어딘가 음전해보이지만 동시에 장난꾸러기 같은 작가의 얼굴에서 이미 이런 위험한 쾌락관을 읽어낸 것도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더불어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지식의 일단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구술의 능력이 좋은 것을 두고, 그저 동양인은 예로부터 필기시험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는 일차적인 결론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동양에 비하여 종이가 부족하였던 서양의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보면 역시 ‘지식여행자’ 요네하라 마리 여사답다, 싶다.


“많은 일을 컴퓨터로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기억력뿐만 아니라 계산력이라든가 정보정리력 같은 ‘뇌의 잡일’이라 할 몇 가지 작업을 전뇌電腦에 넘겨주게 되었다. 육체노동만이 아니라, 정신노동의 부담에서도 인간을 해방시켜, 가지고 있는 힘을 될 수 있는 한 창조적인 일에 쓰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력이란 무엇일까. 기억력이나 정보정리력 같은 뇌의 기초체력 위에 성립하는 무엇이 아닐까. 우리는 양배추 잎을 벗겨내듯, 앞으로도 뇌가 가진 힘을 자꾸자꾸 깎아내는 짓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더불어, 마지막으로 치닫는 여름 주말, 홀로 사무실에 우두망찰 앉아 있다가 나의 ‘기초체력’에 대한 상념에 빠져든다. 창조와 관련된 기초체력은 고사하고 비즈니스와 관련된 기초체력 또한 허약하기 그지없는 내가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심약과 나태와 허약과 빈곤이 고루고루 포진한 몸뚱이를 물끄러미 목도하다, 나를 나로부터 구해줄 답안의 힌트를 제공할 책은 언제 발견하게 될까, 우문을 내뱉어본다.



요네하라 마리 / 조영렬 역 / 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心腸に毛が生えている理由) / 마음산책 / 276쪽 / 200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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