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신야 《티베트 방랑》

'퇴화한 지금'으로부터 '진보적인 그들의 지금의 바다'를 향한 한 일본

by 우주에부는바람

시간 상으로는 <인도방랑> 이후에 씌어진 책이다. <인도방랑>과 마찬가지로 90년도 이후 (이 책은 1995년) 문고판으로 출간된 책의 번역본이다. 아마도 1977년 처음 발간된 이후 몇 차례 판형을 바꾸며 출간되다가 1995년 새롭게 문고판으로 나온 이후, 그것을 원본으로 삼아 번역된 책이라고 보여진다. 뭔가 원본으로부터 멀어진 느낌이라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책의 시작 부분에 실린 ‘타임 슬립’이라는 제목의 머리말을 읽으면 그런 서운함이 쑥 들어갈 것이다. (이 머리말은 1982년에 작성된 것이니, 1977년 처음 나온 책을 본 이들은 이 머리말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 지구에는 다양한 지층 연대가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는 시간 계측에 그런 다양한 지층 위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것을 뭉뚱그려 끼워 맞추는 사고방식은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진보한 나라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을 지금이라는 시간의 계량 기준으로 삼는 풍조는 단순한 오만이다. 지구에 사는 각각의 사람에게는 각각의 지금이 있다... 과거 십 수 년의 여행에서 나는 가장 급진적인 지금을 가진 나라로부터 중세 이전의 시간을 가진 나라까지 다양한 지층 연대의 땅을 몇 번이고 타임 슬립 (time slip, 현실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나 미래로 옮겨가는 일 - 옮긴이) 했다. 그런 여행 속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하나의 작고 단순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유지해온 지금은 과거의 지금으로부터 현재 또는 미래의 지금을 향해 역진화 逆進化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과학은 진화하고 인간적인 것은 퇴화하는 지구상의 시간 구도가 분명하게 보였다... 이 책은 그 인간으로서 퇴화한 지금을 가진 한 일본 청년이 과거를 향해 인간으로서 보다 진보적인 그들의 지금의 바다 속에 자신을 투입한 작은 기록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기준으로 하여 (대략 문명화된 도시라는 기준) 현재, 그리고 우리의 현재보다 못한 뒤떨어진 과거를 가진 나라 혹은 도시 혹은 문명을 나누지만 그것은 잘못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과학은 진화하였을지 모르나 인간으로서는 퇴화한 것인지도 모를 현재의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그러니 티베트 여행은 우리의 기준으로 낙후된 과거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으로 진화된 세상을 향한 것이라는 통찰을 보여준다.


“2000년의 혼명昏冥 속 진창에서 태어난 연꽃이 진창 위로 신성한 꽃을 피우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저 히말라야 뒤편에 사는 티베트 백성은 아침저녁 햇살을 머금고 다홍빛으로 물드는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연꽃잎 하나하나에 비유한다. 그들이 말하듯 히말라야가 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라면, 도대체 인도 사바세계를 두고 진창이라는 말보다 더 그럴듯한 비유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오랜 시간 인도방랑의 시간을 보낸 작가는 지척에 있는 히말라야 근방의 티베트를 진작에 향했을 법한데도 미루고 미뤘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인도라는 진창의 세계에서 티베트라는 천상을 닮은 세상을 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고, 종교가 인간 속으로 체화되어 있는 인도에 비하여 종교 안으로 인간이 들어가 있는 티베트라는 곳에 대한 어떤 반항심이었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나는 몸이 좋지 않거나 할 때 종교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부처 앞에서는 아멘이라고 말하고, 십자가 앞에서는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말하고, 아크바르 신전에서는 옴마니반메훔이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래서 내 몸에는 빛나는 말이 따라붙지 않는다. 말을 갖지 않은 자는 신심이 없다고 한다. 실망하지 않는다. 말없이 돌을 주워 들고 싶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신심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부처나 그리스도나 알라가 보이지 않아도, 신심이 없기 때문에 돌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이 가난한 자의 무기다.”


이러한 반종교적인 작가의 심사는 이전의 산문들 속에서도 흔하게 보여진다. 그리고 종교와 일상을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티베트 사회에서 그의 종교를 향한 꼬인 심사는 더욱 극명해진다. 그래서 이번 산문에 나타나는 승려들은 나태하기 그지 없는 종교인일 뿐이다. 대신 작가의 시선은 팍팍하기만 한 티베트의 자연 풍광을 섬세하게 풀어 쓰고, 그 자연의 연유에 대해 꼼꼼하게 사색하는 데에 온전히 할애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 한번은 어느 노승이 이 땅에 전해 내려오는 단조로운 신화를 다음가 같이 조목조목 들려준 적이 있다... 옛날 옛적에 이 땅의 천상을 지배하는 신이 있었다... 천상에서 생명체가 깃들어 살지 않는 메마른 불모지를 바라보고 있다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계를 향해 자혜의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불모의 땅에 작은 습지가 생겨났다... 그곳에 녹지가 만들어졌다... 그 녹지의 고도孤島에 원숭이가 태어났다.. 그것이 우리의 조상이다.”


사실 <황천의 개>에서 시작된 후지와라 신야 읽기가 조금 지루해지고 있다. 이상하게도 내가 읽은 책의 순서에 따라 실린 사진이 늘어나고 산문의 양은 줄어들었는데, 산문의 양이 줄어들수록 재미와 감흥이 떨어진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그리고 <동양기행>은 다른 책들보다 사진이 더 많이 실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가 눈앞이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읽을 작정이다. 인도를 방랑하던 작가가 지척에 놓인 히말라야의 티베트에 들어서기를 망설이되 결국 들어선 것처럼, 재미의 수위가 더 낮아진다고 해도 결국 이 작가의 번역물을 모두 읽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후지와라 신야 / 이윤정 역 / 티베트 방랑 (西藏放浪) / 작가정신 / 372쪽 / 2010 (1977, 1995)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요네하라 마리 《미녀냐 추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