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체를 살피듯 현대 사회의 면면을 살피는 사진가의 올바른 시선...
후지와라 신야의 팬이 되기로 작정을 하고 차근차근 그의 책을 읽어나가는 중이다. (물론 <동경기행>은 맨 마지막에 읽을 생각이다. 가장 먼저 도착해서 가장 나중에 읽혀지는 그런 운명이라고나 할까.) 이번에 집어 든 것은 1980년대 작가가 미국을 여행한 후에 쓴 <아메리카 기행>이다. 이번에도 <황천의 개>와 마찬가지로 앞에 실린 십여장의 사진을 제외한다면 사진집이라기 보다는 산문집이라고 보아야겠다.
“로스앤젤레스에 한 달쯤 머물다가 서해안의 US하이웨이를 따라 샌프란시스코까지 북상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을 횡단해 뉴욕으로, 뉴욕에서 동해안선을 따라 미국의 최남단 플로리다 키웨스트까지. 키웨스트에서 다시 북상. 남부를 재차 횡단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7개월간 1만 2,000마일(약 2만 킬로미터)의 여행이다...”
7개월이라는 여행 기간 동안 샅샅이 미국을 살펴보기 원했던 작가가 고른 여행 수단은 모터홈,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캠핑카이다. 그는 이 캠핑카를 타고 미국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남쪽에서 북쪽을 오고 가는 여행을 하며 길 위의 사람을 만나고, 마주치는 어떤 상황이나 물건이나 장소 등에서 미국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들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이 작은 단초들은 작가의 번뜩이는 통찰과 버무려지면서, 거대한 나라 미국을 이해하는 좋은 지침서가 된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집단으로서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균질의 집단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상징이다... 미국 대중문화의 중추인 영화산업이 필연적으로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흥국興國의 신화를 갖고 있듯이 미국 영화는 미국의 ‘역사’를 미국인에게 이야기하고, 미국이 갖지 못한 ‘신화’를 미국인에게 들려주었다. 영화에 출연한 스타는 미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우상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영화 속 우상의 이미지를 다른 어떤 나라보다 소중히 여긴다...”
여행하고 사진을 찍는 작가는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스타를 대하는 미국인들의 자세를 통하여 미국의 영화가 꿈꾸는 바를 이야기하고, 여행 중에 자신을 허기로부터 구원해주는 음식 햄버거로부터 (그리고 패스트푸드점 맥도널드를 통하여) 미국의 사상과 미국의 마음을 읽어내기도 한다.
“햄버거에서 미국의 사상을 찾아보기 전에 육식민족인 서양에서 음식의 주축은 ‘고기’라는 원칙부터 기억해야 한다. 모든 기본적인 음식 중 고기처럼 계급제를 반증하는 식품도 드물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부자는 로스를 먹는다. 중류층은 어깨의 상치 고기를 먹고, 가난한 자는 복막이나 주워 먹는다. 고기는 곡물과 달리 인간에게 암묵적으로 계급제도를 강요해왔다... 유럽의 어두운 계급제도에서 탈출해 ‘평등’을 기치로 내세우는 신천지를 이룩한 신유럽인들이 고기의 모든 부위를 아무렇게나 섞어 다진 후 평등하게 나눠 먹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레스토랑에서 갖가지 등급과 크기, 굽는 법이 세분화된 스테이크를 먹을 때보다 맥도널드에서 똑같은 햄버거를 먹을 때, 우리는 완성된 사회주의 국가를 살아가는 것처럼 타자와 나의 차이에서 해방되어 평등과 안도감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햄버거에 담겨 있는 ‘다정한 사상’이다...”
동시에 작가는 사진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아예 망각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린다. 그는 사진가인 자신과 사진기 저쪽에 위치한 피사체 사이의 관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지적을 살펴보면, 그가 피사체를 살피듯 우리 사회의 면면을 살피고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시선이 어째서 정당하며 동시에 우리를 위안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인물이 긴장한 상태에서 사진에 찍혔을 때 그것은 피사체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책임은 사진가에게 있다. 피사체의 표정에는 그와 마주보고 있는 또 한 명의 인간, 즉 사진가의 태도와 표정과 정신상태, 그리고 사진가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카메라라는 ‘무기’로 상대방을 컨트롤하는 사진가의 위치는 무방비하게 자신의 육체를 드러낸 피사체보다 우위에 있다. 이때 사진가는 메스를 손에 쥐고 환자를 내려다보는 의사와 비슷하다.”
<황천의 개>에 비하여 임펙트가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산문집이다. 흔하고 뻔한 여행기들을 출간하는 일에 (일반인과 아마추어 여행가들 뿐만 아니라) 작가들까지 가세하고 있는 현재의 출판문화계가 떠올려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러한 옹골찬 여행기가 곧 나타나겠지, 라고 현실화되지 않은 소망 하나 품어 본다. 바로 그 소망을 실현시킬 누군가가 읽으면 좋겠다, 후지와라 신야의 이러한 책들을...
후지와라 신야 / 김욱 역 / 아메리카 기행 (America) / 청어람미디어 / 383쪽 / 2009, 2010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