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에 찌든 마음을 과신하지 말고, 과도하게 물질화된 현실에 농락당하지도
*2011년 8월 1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사진가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문장과 식견으로 일본 젊은이들의 멘토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후지와라 신야에 대해 듣고 구미가 당겨, 두 권짜리 사진집인 (글과 사진이 절반 정도씩 섞여 있다고 보면 되겠다) <동경기행>을 산 적이 있다. 하지만 화장실 근처의 작은 책장에 다른 잡지들과 함께 두고 몇 번 들춰봤을 뿐, 다큐멘터리 사진의 느낌이 물씬 나는, 붉은 기운 가득한 풍광과 어딘가 어슴푸레하기만 한 시적 언어에 그다지 동하지 않아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후지와라 신야를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가 사진가가 되고 몇 차례의 사진전을 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인터넷 세상의 블로그를 타고 넘나들다 우연히 후배와 다시 연락을 취하게 되는데, 그 후배가 전화를 걸어와 후지와라 신야를 읽고 있는데 형 생각이 나더라고 하는 것 아닌가. 나 또한 화장실에서 간혹 들추는 후지와라 신야를 이야기했으며, 우리는 몇 년 만에 드디어 만나게 되었고, 곰탕을 한 그릇씩 먹은 다음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후지와라 신야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나의 재미없었던 후지와라 신야 읽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후배는 입에 침을 튀기며 엄청난 충격이었던 후지와라 신야 읽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이 전공이며 후지와라 신야의 많은 책들을 두루두루 읽은 후배를 통하여 내가 읽은 <동양기행>은 후지와라 신야의 재미없는 책에 속하며, 재미있는 후지와라 신야 독서를 원한다면 <황천의 개>, <아메리카 기행> 등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젠장할... 그렇게 다시 한 번 후지와라 신야를 읽었고, 이제 후배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통렬하게 깨닫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의 글은 (황천의 개, 라는 챕터의 배경으로 실린 사진 또한)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충격적이다.
“... 아사하라가 보여주는 자아의 끝없는 비대가 사막 같은 사고 양식의 어떤 전형이라고 하다면 그가 야쓰시로라는 자연적 규범을 갖추지 못한, 다시 말해 사막과 풍토가 유사한 토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사막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대체로 규범을 상실한 자연과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을 대신해 비대해지는 인간의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비대해진 자아는 결과적으로 과대망상이라는 정신병리학적 행태를 나타낸다...”
책에 실린 산문들은 사실 일본의 주간지인 주간 플레이보이에 1995년 7월 18일호부터 1996년 5월 28일호까지 ‘세기말 항해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글들이다. (물론 산문집으로 엮이면서 수정 보완이 이뤄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로부터 기인한다. 1995년에 벌어진 세 가지의 사건 (한신 대지진과 윈도우 95 발매, 그리고 옴진리교 사건), 그 중에서도 옴진리교 사건의 당사자들이 인도를 그 출발점으로 하여 그들의 종교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는 점과 자신 또한 그들보다 20여년 앞서 인도를 기행하며 구축했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작가는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의 고향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아사하라 쇼코의 옴진리교, 그 기원에는 미나마타 지방과 가까운 곳에서 자란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시력 장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작가의 물음이 어느 정도 진척이 되는 찰나 산문은 갑작스레 일본에서 인도로 그 공간을 옮긴다. (책의 말미에 드러나는 바, 작가는 아사하라 쇼코의 형 만코를 만나 결정적인 이야기들을 들었으나, 이를 텍스트화시켜 알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였고, 그 탓에 더 이상 관련한 산문을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아사하라 쇼코의 형이 죽고 난 다음인 2006년이 되어서야 십여 년 전 만코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포함한, 이 산문집을 발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정치와 경제에 대해 말한다면 생활의 풍요가 보장된 현실 세계에서 시스템은 무의미한 억압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 같은 외부 요인들이 ‘현실’이고 ‘자연’이라면 미디어를 통해 가상 환경에 생존을 의지해온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그 시작부터 현실과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 세계는 그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아니다...”
아사하라 쇼코, 그리고 그를 추종하던 젊은이들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작가가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일본의 젊은이였다. 그렇게 그는 산문집의 두 번째 챕터인 <황천의 개>에서 도쿄대를 나온, 무기력한 직장 생활을 하지만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품는 한 젊은이와 일본의 현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숨겨진 화두로 삼아 인터뷰를 갖게 된다.
“... 요즘 아이들은 냇가나 산에 흥미를 잃은 게 아냐.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거야. 농약을 마구 뿌려대고 개천을 메우는 공사가 한창이야. 개천이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물고기가 어디 있겠나? 콘크리트로 담을 쳐버린, 물고기가 없는 냇가에 아이들이 흥미를 갖지 않는 건 당연한 결과야. 산과 물을 빼앗긴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던져준 것도 어른들이었어... 그런 악덕 행정이 지난 5, 60년 동안 일본에서 행해졌어. 일본의 기성세대에 의해서 말이지.”
그렇지만 후지와라 신야는 모든 문제의 핵심을 그들 젊은이들에게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간 사회 시스템, 그리고 그러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한 기성세대들을 향하여 그 책임을 묻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젊은 시절,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인도에서의 경험을 인터뷰 요청자였던 이 젊은이에게 들려준다. 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를 태우는 장면, 그리고 그 화장터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시체를 물어뜯는 들개들, 그 들개들로부터 죽음과 근접한 위협을 당했던 작가의 젊은 경험은 그렇게 몇 십 년의 시차를 두고 또 다른 젊은이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장작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아무렇지 않게 태워버리는 거야... 처음엔 시체를 싸고 있던 포목에 불이 붙고 곧이어 발가벗은 몸뚱이가 드러나지. 불은 그 시체 구석구석을 핥기 시작해. 피부가 타고 잠시 후엔 살 속으로 불이 파고 들어가지. 인간의 몸은 90퍼센트가 수분이야. 그 수분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거야. 발가벗은 몸뚱이가 점점 팽창하고 지방은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뿜지... 허연 내장이 흘러나오면 거기에 불이 붙어 불꽃이 튀어 올라. 그러면 떠돌이 개들이 기다렸다는 듯 서로 싸움질을 하면서 그 내장을 물어뜯곤 했지... 우리는 지나치게 목숨을 과대평가했고, 죽음이 우리 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믿어왔지.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희석시킨 주범이었어. 부모의 기대와 과보호에 노출된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신의 소중함을 증명하려고 초조해하듯,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야.”
그리고 이 세대를 뛰어 넘는 대화 속에서 청년시절의 후지와라 신야가 인도 여행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도달하려고 했던 ‘신체의 리얼리티’, 그리고 각종 미디어라는 필터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는 현대 젊은이들의 여과된 ‘리얼리티’가 극명하게 비교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외부 세계와의 직접적인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갈등 없이, 일종의 시스템화된 사회에서 미디어가 제공하는 현실에만 길들여진 현대 젊은이들의 위험천만한 현실 인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 우리 세대는 모든 걸 그런 식으로 보게 돼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게 의사疑似 현실처럼 우리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죠.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리얼리즘도 전해지지 않아요. 그래서 픽션이라는 필터로 현실을 여과하는 거죠. 그러면 조금씩 그 현실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쉽게 말해 현실을 반쯤 픽션화시키면 리얼리티가 이해되는 겁니다...”
이러한 인터뷰를 거치고 또 다른 인도에서의 경험들을 떠올리면서 작가는 또다시 옴진리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끄집어낸다. 아사하라 쇼코라는 미치광이 사이코패스와 그의 추종자가 벌인 엽기적인 범죄로서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사회가 쉽게 지나쳐온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응집되고 들들 끓어 결국 폭발함으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사하라 쇼코에게 사형 판결이 선고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옴진리교를 컬트적 범죄 집단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다만 내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옴진리교를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옴진리교를 잉태한 사회구조에 대한 논의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왜 세기말 일본에서 저런 청년들이 대량으로 등장했는지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공론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신야의 글을 읽는 동안 무심코 얼마전 케이블 티비 드라마인 <신의 퀴즈>의 한 편에서 나온 대사가 떠올랐다. 드라마 속의 장박사는 왜 사이코패스가 늘어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략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이 바로 사이코패스인 거야. 오직 자신만을 알고 남의 고통이나 슬픔 따위는 무시해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거지. 이러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몸 속에 사이코패스 유전자가 생길지도 몰라. 우리는 그걸 자연스럽게 다음 세상에 물려주고.”
그러니까 후지와라 신야의 산문은 아사하라 쇼코라는 사이코패스를 단죄하는 것으로 모든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기는 일본 사회를 향한 통렬한 외침 같은 것이다.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사이코패스 유전자의 축적을 요구하고 있는 한 또 다른 형태의 아사하라 쇼코가 출현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충고이고, 이러한 유전자의 전달을 끊기 위해서는 환영에 찌든 마음을 과신하지 말고 과도하게 물질화된 현실에 농락당하지 말라는 절규이다. 그리고 이 순간 더욱 섬뜩한 것은, (언제나 한 발 자욱 뒤에서 안쓰럽게 일본의 점철을 밟아가는) 우리 사회는 이러한 절규로 가득 찬 충고를 하는 이들조차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후지와라 신야 / 김욱 역 / 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黃泉の犬) / 청어람미디어 / 335쪽 / 2009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