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百(백)의 그림자》

실체 없는 그림자는 따라가는 대신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진리의...

by 우주에부는바람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그림자 같은 것은 따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의식을 하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그림자를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그림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더 이상 어둠의 속, 웅크리고 있기 싫다며 그림자가 반기를 드는 순간 우리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그 그림자를 따라 알 수 없는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 그날 이후로 소년 무재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남몰래 그림자를 따라가거나 하는 듯 별로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나날이 핼쑥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했다면 그것은 그림자, 그림자라는 것은 한번 일어서기 시작하면 참으로 집요하기 때문에 그 몸은 만사 끝장, 일단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으니 살 수가 없다, 는 등의 이야기를 아무 곳에서나 불쑥 말하곤 하다가 그는 귀신 같은 모습이 되어 죽고 맙니다.”


소설은 사십여 년이 된 전자 상가, 이제 곧 허물어지고 재개발이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그곳에 있는 여씨 아저씨의 수리실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맡고 있는 은교, 그리고 그 전자 상가의 다른 곳에서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으로 일하는 무재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들이 수시로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그림자 혹은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은교가 일하는 수리실의 여 씨는 그림자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여기려고 애쓴다. 그래서 한 두 번 그림자를 따라갈 뻔, 하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용케 버텨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박 씨 아저씨의 아버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절반 정도 뜯겨버리고 난 다음에 ‘이치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면서 전자 상가를 배회하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 욕실 쪽으로 서너 걸음 걷다가 넘어졌다. 분명 발이 걸렸다. 걸릴 만한 것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 끝이 반 뼘쯤 솟아 있었다. 바닥에 남은 것은 희미한데 거기서 솟아난 것은 조금 더 분명한 빛깔을 띠고 있어서, 내 그림자란 이렇게 솟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무재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은교처럼, 무재 또한 어느 날은 자신의 그림자에게 걸려 넘어지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용케 넘어지지 않은 무재는 허름한 차를 빌려 은교와 함께 섬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은교는 무재의 그림자 혹은 무재의 존재감을 지긋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벌판의 어둠이 그림자를 빨아들이고, 그림자가 어둠에 이어져,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부터가 어둠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섬 전체가 무재 씨의 그림자인 듯했다.”


우리들 개개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우리들 삶의 어둠태인 그림자, 그렇게 실체가 아니면서 실체가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그림자를 따라갈 때 우리는 허위 속에서 위태로울 수 있겠다. 하지만 그림자를 쫓아가지 않는 나, 혹은 그림자를 넘어서는 너, 그래서 그림자를 뒤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존재감을 획득하는 우리는 어떤 것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황정은 / 百(백)의 그림자 / 민음사 / 192쪽 / 201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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