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순환을 끊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때,이 여인의 비석에 이름을
*2011년 7월 3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집중호우로 서울이라는 이름의 메가시티가 수면 아래로 잠기던 그 시간, 꼭 보고 싶은 두 편의 영화가 있어 하루의 휴가를 내어, 광화문 도심에 위치한 영화관을 찾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었고, 기적처럼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객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인 어 베러 월드>와 <그을린 사랑> 두 편의 영화를 (중간에 홀로 점심을 먹었다. 삼삼오오 점심을 먹고 있는 회사원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쌀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봤다.
예술영화 전용관이라는 컨셉의 영화관의 (생각보다는 많았으나) 객석은 한산하였고, 오랜만에 조용히 물 속에 갇힌 듯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고, <그을린 사랑>을 보고나자 마치 긴 꿈을 꾼 듯 잠시 현실로 돌아오기 힘든 몽환으로 휘청였다. 물론 화사한 꿈은 아니어서 난 악몽과 현실 사이의 시차 앞에 잠시 망연자실 하였다. 사실 그 악몽의 뉘앙스는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물 속에서 꾸는 꿈과 같았던 관람의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뚫어지게 우리를 응시하던 소년의 설명 불가능한 눈동자 속으로 이어지고 만다.
“관에 넣지 말고 나체로 기도문 없이 묻어주세요.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시신은 엎어놔 주세요. 비석은 놓지 말고 이름도 새기지 마세요.”
소년의 눈동자를 가까스로 통과하고 나면 영화는 갑작스레 알 수 없는 침묵 속으로 빠져든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죽음 이후, 공증인인 르벨 앞에서 어머니의 유언을 듣는 잔느와 시몽에게로 이어진다. 말도 안 되는 유언의 내용과 함께 잔느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줄 알았던) 아버지를 찾아 편지를 전달하라는, 시몽에게는 (마찬가지로 그 존재를 알지 못하였던) 형을 찾아 편지를 전달하라는, 마치 신탁과도 같은 죽은 어머니의 청탁이 전달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자의와 타의 사이에서 죽음에 이른 듯 한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시몽은 이러한 유언에 반발하지만 이론수학을 전공하는 잔느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온다’는 지도교수의 조언에 따라 나왈 마르완의 사진 한 장과 그녀의 여권을 가지고 어머니의 고향으로 날아간다. 잔느가 나왈 마르완의 고향, 감독의 말에 따르면 레바논과 시리아와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낀 조그만 지역인 가상의 국가 ‘푸아드의 계곡’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면 영화의 또다른 한 켠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고향 마을을 떠나려는 나왈 마르완과 그녀의 이교도 남자 친구였던 와합에게로 연결된다. 마을의 경계를 지키던 나왈 마르완의 오빠는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와합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나왈에게도 총구를 들이미는 순간, 나왈의 할머니가 나서서 나왈, 그리고 아직 태중에 있는 그녀와 와합의 아이를 구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나왈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이 니하드를 낳지만, 신탁의 두려움으로 오이디푸스의 발목을 묶어 버리는 이오카스테처럼 뒤꿈치에 세 개의 점을 찍은 후 아기를 비기독교 지역의 고아원에 보내게 된다. 이후 나왈은 도시의 삼촌댁에 머물며 대학교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지만, 고아원이 있는 남부 지역이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파괴되고 있음을 알고 아들 니하드를 찾아 그곳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기독교 민병대의 학살 장면과 자신의 아들이 머물던 고아원이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민병대 대장을 암살하는 작전에 자원하고, 결국 임무를 완수한 후 코파르 리얏 감옥에 갇혀 십오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사이 잔느 또한 어머니의 고향과 납부 지역, 그리고 어머니가 갇혔던 감옥으로 계속 장소를 이동하며 점점 진실에 근접해 가고, 프랑스에 있던 동생 시몽을 그곳으로 불러 들인다.
( * 지금까지의 내용은 상관없지만, 만약 영화를 직접 볼 의향이 있으신 분이라면 이후의 글은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영화를 볼 생각이라면 모르는 것이 나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1+1=2가 아니야. 1+1=1일 수도 있는 건가.”
잔느를 호텔에 남겨놓고 나왈 마르완의 감옥 생활, 그녀를 고문하고 강간하였던 아부 타렉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자와 만나고 돌아온 시몽은 (수학자인 잔느에게 아주 적절하게도) 알 듯 모를 듯 한 말로 그 결과를 전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잔혹한 진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찾아야 하는 자신들의 아버지인 고문 기술자 아부 타렉과 또한 자신들이 찾아야 하는 자신들의 오빠이자 형인 니하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임을 깨달은 잔느는 소름돋는 절규를 하고 만다.
“너희들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공포였다. 그럼 너희 아버지의 시작은? 그건 위대한 사랑이었다.”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에 의해 잉태된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의 시작이 공포였다면 니하드는 나왈 마르완이 종교가 다른 남자 와합과의 목숨을 건 위대한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렇게 캐나다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나왈이 발뒤꿈치에 새겨진 세 개의 점이 있는 니하드를 발견하고, 그 자가 바로 자신을 강간하여 쌍둥이를 잉태시킨 아부 타렉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러니까 공포와 위대한 사랑이 조우하는 순간 그녀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니하드와의 약속, 반드시 찾아내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남은 두 아이에게 엄청난 유언을 남긴 것이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덕분에 마침내 약속을 지켜냈구나. 흐름은 끊어진거야. 너희를 달랠 시간을 드디어 갖게 됐어. 자장가를 부르며 위로해줄 시간을.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 너희를 사랑한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잔느와 시몽은 캐나다로 돌아와 자신들의 아버지인 아부 타렉, 그리고 오빠이자 형인 니하드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감옥의 72번 수감자이자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리웠던 나왈 마르완이 남긴 두 장의 편지를 전달한다.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 그리고 아이들의 오빠이자 형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니하드 혹은 아부 타렉이 만약 오이디푸스라면 자신의 눈을 찔러야 하겠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멈춘다.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 사이에서 태어났고 비기독교도에 의해 전쟁광인 암살자로 길러졌으며 다시 기독교도에 의해 고문 기술자로 거듭나는, 자신의 어머니가 보내는 무한한 사랑 속에서 태어났으나 곧바로 버려졌으며 생사를 건 전쟁의 한복판에서 초인적인 증오를 품고 살아남은 이 현대판 오이디푸스의의 여정은 드러난 진실과함께 일단락이 되는 것이다.
<인 어 베러 월드>를 보며 느껴야만 했던 조마조마한 폭력과 용서의 딜레마가 수그러들기도 전에 <그을린 사랑>이 뿜어내는 증오와 사랑의 아이러니 속 처참한 진실을 목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피할 곳 없는 객석에 앉아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적나라한 진실을 직시하는 순간, 영화의 선전 문구에 등장하는 ‘전율’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햇빛 아래에 내 이름을 새겨도 됩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원작자는 와이디 무아와드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되풀이되는 듯 침묵으로도 봉일될 수 없는 진실을 통하여, 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떠안아야만 하는 증오의 순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숙제를 던지는 한 여인의 거룩한 일생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이제 이 영화를 본 우리들이 증오의 순환을 멈추고 위대한 사랑을 하겠다는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여길 수 있을 때, 그때가 되어야 이 여인의 이름을 햇빛 아래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을린 사랑 (Incendies) / 드니 빌뇌브 감독 / 루브나 아자발, 멜리사 디소르미스-폴린, 맥심 고데테 출연 / 130분 / 2011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