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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Sep 13. 2024

수잔 비에르 감독 <인 어 베러 월드>

희생의 제의를 거치지 않고서도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현명함을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특히 자신의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왠 사내에게 당한 아버지 안톤이 아이들을 추슬러서 돌아가는 장면,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에게 왜 그 사내에게 맞서지 않느냐고 묻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두운 객석의 의자 위에서 홀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 안톤이 계속해서 의구심을 품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다시 그 사내를 찾아간 다음의 행적 또한 여전히 속시원하지는 못했는데, 그 순간 문득 한 가지 사적인 사건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몇 해 전의 일이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2호선 잠실역에서 내려 8호선으로 갈아타는 통로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좌측통행이 우측통행으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심히 홍보 중이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아무 생각없이 좌측으로 걷다가 노숙자 행색의 남자와 스치듯 비껴가게 되었는데, 이 남자가 좌측으로 걷고 있는 나와 아내를 향하여 듣기에 거북한 욕을 하면서 지나갔다. 사람들의 흐름이 끊이지 않는 시간이었고,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그저 욕을 먹은 채로 지나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동요는 그 후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그 남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으면서도, 방금 지나친 그 사람을 쫓아가야 하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왜 제대로 그 인간과 마주쳐서 따지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나, 그 인간이 그렇게 욕을 하는 순간 나는 더욱 심한 욕으로 받아쳤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였으며 그것이 생각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그 남자에게 하고 싶었던 욕을 읊조리듯 내뱉고 말았다.


  옆에 있던 아내는 의아한 표정으로 깜짝 놀랐고, 나의 그러한 태도가 얼마 전에 지나친 그 노숙자 행색의 남자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귀신처럼 눈치 챘다. 그리고 아내는 나의 관용적이지 못한 태도, 더불어 이미 지나간 사소한 일에 대한 엉뚱한 집착 등을 나무랐다. 게다가 상대는 그다지 온전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런 사람을 향하여 뒤늦은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온당치 못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물론 어쩐지 분하다, 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게다가 나의 이런 분한 마음은 아내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어어서 더욱 커진 것이었지만) 다행히도 평화를 지향하는 아내 덕에 그나마 마음을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만약 그때 나의 아내가 나를 오히려 다그쳤다면,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크리스티안이 엘리아스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치듯이 왜 그따위 남자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는 것이냐고 다그쳤다면 어떠했을까. 그래서 내가 그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무례하였던 그 남자를 찾아 지하철 역사를 헤매고, 그렇게 그 남자를 찾아내고 뭔가 불미스러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러한 사소한 사건이 있었지만 집에 무사히 도착하여 우리가 없는 사이 집을 지키고 있던 고양이 두 마리를 쓰다듬고, 우리가 본 연극을 떠올리고, 침대에 너부러져 티비를 보거나 책을 읽는 따위의 평화로운 시간을 포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에는 그 규모가 다른 두 가지의 폭력이 존재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폭력은 그야말로 작고 사소한 폭력에 해당한다. 덴마크의 작은 마을에서 위세를 부리는 한 사내로부터 폭력을 당한 안톤은 사실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 봉사를 하는 의사이다. 그리고 안톤은 바로 그곳 난민 캠프에서 거대하고 잔혹한 폭력의 희생자들과 매일매일 마주치는 사람이다. 그러한 안톤은 덴마크 작은 마을, 사소한 폭력을 휘두른 가해자에게 복수 대신 스스로 순환을 매듭짓지만, 그후 다시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로 돌아와 더욱 거대한 폭력의 가해자와 맞닥뜨리게 된다. 안톤은 덴마크 작은 마을의 가해자에게 하였듯, 이 거대한 폭력의 가해자를 환자로 받아들이고 치료를 하지만, 결국 그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그 폭력의 피해자들인 다수에게 그 가해자를 내주고 만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 매듭짓지 못한 폭력의 순환은 나비 효과라도 일으킨 것처럼 곧이어 덴마크의 작은 마을에서 안톤의 아들이 벌이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복수를 감행할 것을 채근하는 크리스찬과 의기투합한 엘리아스는 그 가해자의 차량 폭발을 시도하지만, 그 순간 그곳을 지나치던 무고한 모녀를 위하여 현장에 뛰어들고, 안토의 아들 엘리아스는 크게 다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아스의 희생은 드디어 선한 순환을 발생시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마음 속 강한 증오심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던 크리스티안을 움직이게 만든다.


  폭력과 이것에 대한 보복이 되풀이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복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엘리아스의 희생으로 완전하게 마무리되는 순간, 드디어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칼을 휘두를 정도의 호전적인 적개심을 보이고 폭죽에서 화약을 꺼내 사제 폭탄을 만들 정도로 살기등등하던 크리스티안은 눈물 흘리며 아버지의 품에 뛰어드는 소년으로 탈바꿈되고, 그렇게 폭력의 순환은 희생의 제의를 거치며 사랑의 순환으로 형질을 변경시키게 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와 덴마크 작은 마을을 오가며 폭력과 사랑의 아이러니한 변주를 보여주는 연출은 그야말로 훌륭하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소년의 순수한 적개심과 적개심이 사라진 뒤의 순수한 소년을 동시에 보여주던 윌리엄 욘크니슨의 연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희생의 제의를 거치고 나서야 매듭지을 수 있었던 폭력의 순환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지만, 어쩌면 감독은 (나의 아내가 그러하였듯) 폭력의 순환 이전에 스스로를 다독여 그 고리를 끊는 현명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인 어 베러 월드 (Haevnen, In A Better World) / 수잔 비에르 감독 / 윌리엄 욘크 닐슨, 마르쿠스, 리가륻, 미카엘 페르스브렁, 트린 디어홈, 율리히 톰센 출연 / 113분 / 2011 (2010)



  ps. 영화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으로 빈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던 크리스찬을 발견한 후 안톤이 그 소년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과 죽음 사이엔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 그러다가 그 장막이 사라질 때가 있는데 그것은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을 때야. 우리는 그 순간 죽음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지. 하지만 장막은 곧 다시 드리워지게 되고,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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