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동안 샤론의 장미는 속삭이는 듯한 빗소리가 들리는 헛간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지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일어나서는 깃이불을 몸에 꼭 여몄다. 천천히 구석으로 걸어가서 쇠잔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크게 뜬 겁먹은 눈을 들여다 보았다. 이어 천천히 사나이의 곁에 드러누웠다. 사나이가 느릿느릿 고개를 가로저었다. 샤론의 장미는 깃이불을 헤치고 유방을 내놓았다. “먹어야 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몸을 꿈틀거리며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사나이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녀의 손이 사나이의 머리 뒤로 돌아가서 그것을 받쳤다. 손가락이 가만가만 사나이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눈을 들어 헛간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다물어지고 신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중, 동서문화사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이다. 여자는 자세를 바로 한 채, 갑자기 옷깃을 풀었다. 내 귓전에는 뻣뻣한 허리띠를 안쪽에서 잡아당기는 비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나는 숨을 죽였다. 여자는 하얗고 풍만한 젖가슴의 한쪽을, 그대로 자기 손으로 꺼냈다.
사관은 짙은 색 찻잔을 받쳐 들고, 여자 앞에 무릎 꿇은 채로 다가갔다. 여자는 젖가슴을 양 손으로 주물렀다.
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짙은 색 찻잔 속에서 거품을 띄우고 있는 연둣빛 차에, 희고 따듯한 젖이 뿜어나와, 방울을 남기며 잔 속에 담기는 모양, 고요한 차의 표면이 하얀 젖으로 흐려져 거품을 일으키는 모양을, 바로 눈앞에 보듯이 역력히 느꼈다.
사내는 찻잔을 들고, 그 기이한 차를 남김없이 마셨다. 여자의 하얀 가슴도 감추어졌다.
우리 둘은, 긴장하여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차분히 생각하니, 그것은 사관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와 싸움터로 나가는 사관과의, 이별의 의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지만 그 당시의 감동은, 어떠한 해석도 불가능하였다. 너무도 넋을 잃고 바라보았기에, 어느 틈엔가 남녀가 방에서 모습을 감추고, 넓은 주홍빛 양탄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중, 웅진출판
간혹 유포시키고는 하는 나의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여자의 가슴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외간 여성과 함께 술이라도 마실라치면 당신의 가슴을 조심하라, 는 말을 성희롱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완곡한 표현으로 변형시켜 전달하고는 했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이다. 나의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기미도 이제는 많이 수그러들었다고 보여진다.
(사족처럼 나의 이 잘못된 탐닉의 연원을 생각해본다. 사실 내게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관련한 기억이 전혀 없다. 막내인 남동생이 고등학교 이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젖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연년생인 여동생, 그리고 삼년 터울의 남동생을 둔 나로서는 길어봐야 일 년 남짓의 기간 동안만 진정한 소유자였을 뿐이니 내 기억에 어머니의 젖가슴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연유로, 젖가슴을 충분히 소유하지 못했던 유아기의 서글픔이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다가 청년기에 이르러서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아닐까. 아, 그럴싸하다...)
그리고 위의 두 토막의 가슴에 얽힌 소설 속 장면은 바로 동석한 여성들을 향해 완곡한 표현을 하는 와중에 인용하는 부분들이다. 이 장면들을 시작으로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서 조심들 하시라, 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면 상대방들도 대체로 수긍하고 만다. 하지만 이런 문학외적 사용과는 별개로 난 저 두 작품, 그리고 저 두 대목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여성의 가슴과 관련한 다양한 표현들을 읽은 바 있지만, 저 두 대목을 읽었을 때의 짜릿함을 따라오는 작품은 아직까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미국 대공황 시기, 자신의 농토를 잃고 이주하는 농민집단의 이야기이다. 줄거리가 온전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 마지막 장면만은 눈에 선하다. 처참하고 처참한 장면들의 연속이었던 리얼한 묘사들들을 지나쳐 겨우겨우 마지막 장면에 이른 순간 난 책을 손에서 놓칠만큼 전율하였다.
얼마전 자신의 아이를 잃은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이 몸을 추스릴 공간으로 삼은 움막에는 그런데 다 죽어가는 중년의 사내가 있다. 이 사내의 아이는 울면서 말한다. 자신의 아비가 죽어간다고, 자신에게만 먹을 것을 먹이고, 자신의 아버지는 굶어서 죽어가고 있다고. 그리고 저 마지막 대목이 이어진다. 죽은 아이에게 물렸어야 할 젖을 굶어 죽어가는 중년 사내에게 물리는 여인의 손길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사실 『금각사』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1970년 자신을 지지하는 우익단체의 대원들과 자위대에 난입하여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가 초기의 감수성 짙고 불안해 보이는 작품 성향을 벗어나 남성적인 원리로 나아가는 단계에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게 『금각사』는 그저 탐미주의적인 문학 작품, 이라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데, 그 책임은 전부 앞서 언급한 저 대목 때문이다. 전쟁터에 나가는 남자,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장으로 그 남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여자, 그리고 그녀가 복중에 있는 그의 아이를 키워야 할 젖을 미리 짜서 그에게 건네는 장면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그 장면을 훔쳐보는 주인공이 된 듯 나 또한 넋을 잃어야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좋은 책이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추앙을 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바로 이처럼 강력하게 각인되는 어떤 이미지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금, 하지만 내 머리 속의 한 켠에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이 이미지들이 남아 있다. 그것은 희미해질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퇴색할 수 있지만 변질되지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책에서 받은 이미지의 낙인은 지나간 사랑의 흔적과도 같이 영원토록 날 구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