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삽하게 흩뿌려진 서사와 캐릭터의 파편들 속에서 몇몇 문장들만이...
2001년 데뷔한 이후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 쓴 장편 소설이다. (비슷한 예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가 2005년에 쓴 <흉터와 무늬>라는 소설이 있다.) 작가의 출신 성분이 그러하니 문장들에 스며들어 있는 시적 감수성들이 그렁그렁하다. 작은 흉터 하나에도 풍성한 이미지를 투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인인 소설가들의 특정이라면 특징일 터이다.
“내 이마에는 그때 생긴 흉터가 있다. 만날 앞머리로 가리고 다니지만 기분이 엄청 꿀꿀한 날에는 난초 같은 흉터를 만지며 내 마음의 정원으로 잠입한다. 그곳에는 나무와 노래하는 새가 있고 장미꽃 덤불이 있고 난초 화분과 예쁜 돌맹이도 있다. 돌맹이에서 흰 새가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문장이 가지는 힘에 비하여 서사가 가지는 활력이 부족하고 캐릭터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은 시인이기도 한 소설가가 가지는 약점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이혼 이후 들어온 새엄마와의 불화로 인해 집을 뛰쳐나온 정여울이 대학에서 운동권인 동성의 선배와 동거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의 약자라는 굴레에 스스로 얽매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친엄마를 찾아가는 등 다양한 사간들이 등장하지만 이것들이 일관되게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정여울의 동성애적 취향은 뜬금 없고, 그를 향하여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는 한의사 지현의 캐릭터 또한 어딘지 맥이 풀린다. 주인공 정여울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묘사되던 지민 선배가 캐릭터를 구축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솔이라는 비슷한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도 어쩌면 등장인물들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민 선배의 죽음은 선균씨라는 악한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이 되지만, 한 캐릭터의 죽음과 맞바꾼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선균씨라는 캐릭터는 이후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으니 이마저 허망하다. 여기에 자신을 좋아하는 한의사의 엄마가 우연하게도 정여울의 엄마의 존재를 안다는 설정은 실소를 머금게 되고, 그렇게 찾아간 정여울의 친엄마는 엉뚱하게도 무슨 전도사 노릇만을 하다가 사라지니 이것 또한 흐지부지한 서사와 캐릭터의 전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졸린다. 시커먼 구름처럼 잠이 몰려온다. 누구는 기면증이 분명한 것 같으니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라고 하지만, 난 기절하듯 잠이 드는 이 순간을 탐닉한다... 죽음과 같은 이 수면이 없었다면, 단언컨대 난 이미 죽었을 것이다. 난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떠난 오후에도 그네를 타다 내려와 그대로 잔디밭에서 잠들었고,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쓰러져 잠들었다.”
어쩌면 작가의 의욕이 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라진 친엄마, 어딘가 음습한 구석이 있는 동갑내기 이복 동생의 사망, 발작과 같은 잠, 무르익지 않은 동성애, 80년대 운동권의 어렴풋한 실루엣, 가학적인 변태 성욕자를 비롯해 일일 드라마에서나 나옴직한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랑까지 어쩌면 한 권의 소설에서 다루어지기에는 무모한 것들을 조합하고 있었다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라진 친엄마는 광신도의 모습으로 잠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이복 동생의 사망은 그저 주인공의 머릿속에서나 스쳐지나갈 뿐이며, 주인공의 성취향은 동성애도 이성애도 양성애도 아닌 무색무취인 듯하고, 80년대 운동권의 실루엣은 새로운 세기의 일상에 어울리지 않게 드리워져 있고, 사라진 변태 성욕자는 소설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버린 형국이다. 자신의 생각을 응축하고 폭발시키는 몇몇 좋은 문장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난삽하게 흩뿌려진 서사와 캐릭터의 파편들 속에서 소설의 장점을 찾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김이듬 / 블러드 시스터즈 / 문학동네 / 238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