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 《아주 보통의 연애》

다이나믹하고 경쾌한 칙릿의 기름기를 쏙 빼고 나니 남는 것은...

by 우주에부는바람

패션, 연애, 다이어트 등 당대 젊은 처자들의 관심사를 향하여 거의 비슷한 높이의 시선을 들이미는, <스타일>과 <다이어트의 여왕>이라는 장편 소설을 쓴바 있는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장편 소설에서 보여주던 칙릿소설의 다이나믹하고 경쾌한 모습은 그 흔적만 살짝 보일 뿐, 대체로 무겁고 진지한 작품들이라는 점이 의아하다. 문학 계간지나 월간지에 실릴 단편 소설은 이렇게 써야지, 라며 작심이라도 하고 쓴 듯하다.


「아주 보통의 연애」.

아주 보통의 연애, 라는 제목이 갖는 아이러니에 걸맞게, 소설 속의 연애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보통과는 거리가 멀다. “... 나는 충분히 예열된 복사기 위에 그의 영수증을 똑바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오픈 속 빵처럼 평화롭게 부풀어오르는 영수증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이정우가 가졌을 말랑한 시간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분명히 단순한 영수증 처리반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성실한 학자이며, 진중한 연구자였고, 무엇보다 ‘이정우학’의 대가였다...” 그러니까 소설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 남자의 영수증을 모음으로써 그 남자의 행적을 연구하는, 그러니까 스토킹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한 여자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연애하는 자들이 아무리 보통 같은 연애를 하여도 자신들의 연애는 특별하다고 혹은 특별해야만 한다고 믿는 세태 속에서, 이 특별하기만 한 연애를 보통의 연애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높이 사주고 싶다.


「육백만원의 사나이」.

이혼한 아내가 살고 있는 곳, 아니 이혼한 아내와 함께 하는 자신의 아이들이 있는 곳, 취리히를 가기 위한 길고 긴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육백만 불의 사나이. 당시 사람들은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을 막연히 ‘육백만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지하철 2호선에 앉아 자신의 통장에 찍힌 숫자를 바라보았다... 6,000,000.”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육백만원의 사나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육백만불의 사나이와 같았던 사내는 이제 육백만원의 사나이로 전락을 하였다고나 하겠다.


「청첩장 살인사건」.

일반적인 청첩장이 아닌 고급 청첩장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내가 어느 날 경찰서 취조실에 붙들려 가게 된다. 사내는 죽은 사람들의 자녀들의 결혼식 청첩장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그들의 결혼식 사진에 가족도 아니면서 버젓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건,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엉뚱한 행위에 대한 사내의 대답이다.


「가족 드라마」.

아빠 김호봉, 엄마 김영자, 삼촌 김달봉, 동생 김이소, 나 김아소로 이루어진 이 가족의 이야기가 맥빠진 듯 재미있다. “원래 상사들이란 아랫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럼 아버지들은? ... 원수인 줄 알고 막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데 이렇게 멘트하는 인간들이다...... 내가 니 애비다!” 이런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작가이니 아빠 김호봉은 쉰이 넘은 나이에 이제 담배를 배우겠다고 하고, 엉뚱하게 유방암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다.


「강묘희미용실」.

잘 나가는 소설가 H의 편집자인 출판사 직원 강묘희는 오랜만에 발표한 H의 연애소설이 그야말로 최악의 작품이 될 것임을 알게 되고, H와는 연락이 되지를 않고, 엉뚱하게 자신과 이름이 같은 강묘희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강묘희미용실을 검색하게 되고, 그곳에 찾아갈 생각을 하게 되고, 여행 중에 휴게소의 여자 조명희를 자신의 차에 태우게 되고, 그렇게 결국 찾아갔건만 ‘매주 화요일은 쉽니다.’라는 팻말과 함께 불꺼진 미용실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H의 말을 떠올린다. “넌 섹스나 키스도 책으로 배워야 하는 사람이니까. 살아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애정이 있긴 한 거야? 사랑과 질투를 구별하는 건, 편집자로서 중요한 자질이야.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질투하는거야. 네가 쓰지 못한 내 책을 질투하는 거지.”


「푹」.

조금은 뻔한 스토리이다. 제목만이 푹, 뇌리에 박힐 법한... 오래전 벌어진 성폭행의 사건이 이제 어른이 된 그들의 손가락 절단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절단된 손가락은 그들의 여인들을 향하여 차근차근 배달된다는...


「미라」.

박학다식하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을 가진 여자 미라, 그러나 미라와의 섹스는 그 엄격한 진행 과정이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그리고 미라는 새벽 세시에 전화를 걸어 끝도 없이 이야기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회사원인 나는 끊임없이 잠 부족에 시달려야 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서서히 밝혀지는 미라의 정체 아니 미라의 병의 정체와 그 이후 나는 다른 여자와의 섹스 이후 이렇게 말한다. “콘돔은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줘요.”


「고양이 샨티」.

“샨티(santi). 평화라는 뜻이다. 영어의 피스(peace)보다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산스크리트어. 샨티, 요가가 시작되고 끝날 때 만트라로 사용되기도 한다. 평화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고양이와 동거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고양이는 죽은 애인의 것이었다...” 고양이 샨티를 키우는 나와 나의 옆집에 살고 있으며 수시로 우리집 현관을 발로 차는 히스테릭한 여자와 우유투입구를 통해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자 한 것이었는지 날카롭기 그지 없었던 고양이 샨티의 이야기이다. 고양이가 등장함에도 전혀 사랑스럽거나 아름답지 않은, 그저 묘한 이야기...



백영옥 / 아주 보통의 연애 / 문학동네 / 286쪽 / 2011 (2011)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김이설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