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 《새》

순환에 순환을 거듭하여 도달한 마지막에는 바로 시작 부분의 시선이 있었다

by 우주에부는바람

*1999년 8월 1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증권회사에서 잘린 중년 남성 A는 어느 날 귀가길에 까마귀같지만 까마귀는 아닌 검은 새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새는 이후 A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사실 A는 지금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다. 회사에서 잘린 일도 일이려니와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퇴직금 전부를 날리게 생긴 것이다. 게다가 부산에 출장을 갔다가 부하 여직원 김지영과 관계를 맺었는데 그 여직원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그가 구 도쿄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길을 잃으면서 소설은 급격하게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급하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해서 만난 소녀는 술집에서 정충식을 만나 자신의 눈먼 동생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고 술집에 도착하자 정충식인줄 알았으나 나중에 박은하임이 탄로난 여자가 A를 상무에게 끌고가고, 그곳에서 A는 다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된다. 그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려다가 A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김지영과 한 집을 쓰는 정희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공중전화부스에서 섹스를 하려다 실패한다. 물론 새로운 임무도 수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집사 하나가 A를 도련님이라 하며 기차에 태워 남천이라는 고장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A는 A가 아닌 다른 인물로 대접받는다. 그러다 A의 정체를 아는 한 인물에 의해 A는 자신이 길을 잃었던 엘리베이터로 돌아오게 되고, 현실의 자신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미 현실 속에서 A는 A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자리에는 박은하에 의해 끌려갔던 곳에서 자신에게 임무를 부여했던 땅딸보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찾아간 김지영은 자신을 몰라 보고 김지영의 친구 정희는 A를 자신의 애인이라고 우긴다. 그 집에서 빠져나온 A는 우연히 장님 소년을 만나고 그 소년과 함께 다시금 도쿄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과거에 자신에게 첫번째 부탁을 했던 소녀에게 그 동생을 인계한다. 소녀는 동생을 찾아다준 A와의 약속을 지켜 자신의 아빠를 죽인 엄마를 살해한 후 받게 된 보험금 삼억원을 은행에 예금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은행들은 모든 예금의 지불을 중지하고, 주변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지금은 전시중이며 이미 이 전쟁을 오년을 끌어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이후 A는 검은 새가 되고 바로 자신 A를 바라보게 된다는 순환형의 이야기이다. A가 만난 새가 나중엔 A가 변하여 생긴 새라는 것, 그리고 소설의 첫 부분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부분과 시선이 시작되는 위치만 바뀌었을 뿐 같은 설정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남미풍이 환상 소설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꼬불꼬불 미로 같은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가다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옳고 그름은 불분명해지며, 결국엔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구분조차 명쾌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문학적 성취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인 소재와 문체와 내러티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문단을 향한, 이 이단의 느낌 가득한 작가의 소설에 일단 의의를 두고 싶다.



하일지 / 새 / 민음사 / 345쪽 / 1999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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