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초여름의 잦은 안개 소식만 잔뜩...
이태원에서 카추사로 근무하던 친구를 둔 덕에 보광동을 기억하고 있다. 순정파인 친구는 미군들을 상대로 웃음을 파는 한 여인을 사랑하였는데, 바로 그 여인이 보광동에 살았다. 일본인의 현지처들이 많이 산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것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는 카추사 친구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러 간혹 이태원을 찾았고, 물론 그곳에서 안개소년과 마주친 기억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안개를 뒤집어쓰고 나온 인간이 있습니다. 그를 받는 순간 간호사는 열 손가락을 팔랑대며 비명을 질렀을 겁니다. 하지만 안개소년은 머리에 뿔이 돋거나 이빨이 삐죽삐죽하거나 뱀 혓바닥을 날름대지 않습니다. 악마도 괴물도 아닙니다. 그저 가스등 불빛처럼 뿌연 안개에 가려져 얼굴이 안 보일 따름이죠.”
사실 소설 전체에 뿌연 안개가 끼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엄마의 어머니인 외할머니 로즈마리의 손에 키워졌고, 안개소년인 탓에 밤에만 그것도 후드티와 마스크로 무장을 한 채 돌아다닐 수 있는 나, 안개소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니 흥미진진하겠구나,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주변에 가득하지만 손으로 잡아챌 수 없는 안개처럼, 소설은 섣부르게 만져지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안개 없는 인간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이해합니다. 나는 불쾌함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존재입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에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나를 출생신고하지 않았으니까요. 없는 사람이나 귀신이나 다를 바가 뭐겠어요.”
그나마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는 안개소년이 만난 주변 사람들 몇몇이 눈에 들어오지만, 이 또한 유효기간이 길지 않으니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것 같다. 안개소년을 보고 그다지 놀라지 않는 소녀 지나, 그리고 안개소년과 비슷한 증상을 몸의 일부에 가지고 있는 예쁜이라 불리우는 노인과 그의 통역사인 묘령의 여인 안 등이 그들이다.
“철수가 성공한 남자의 삶을 사는 것과 달리 꿈속의 안개남자는 늘 똑같은 삶을 살았다. 꿈에서 그는 얼굴 없는 존재의 현실을 산다. 그는 밤에 돌아다니고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잃은 존재다. 안개남자의 밤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흐릿한 밤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면 끝이다. 깨어나는 순간의 근질근질한 자각이 찾아오면 끝이다...”
여기에 느닷없이 챕터가 바뀌는 순간 철수가 등장하니, 이 안개소년은 단순히 얼굴이 없는 안개소년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꿈 속에 등장하는, 꿈 속의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실체 없는 자아의 역할까지 하게 된다. 이처럼 소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토리 라인에, 어느 하나 매력적인 실체를 가지지 못하는 캐릭터들로 가득하다. 넌센스 퀴즈로 가득한 허름한 문방구표 퀴즈집 같다고 해야 할까.
‘기특한 상상력이 미진한 문장력을 상쇄’시킨다라고 작가의 전작 <수상한 식모들>을 칭찬한 바 있으나, 이번 소설은 그 기특한 상상력이 스토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형국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간에 안개로 가득한 이태원 보광동의 밤거리를 돌고 돌고 또 돌고 있는 것만 같으니, 읽고 읽고 또 읽어서 결국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는 동안에도 축축하게 땀으로 젖는 초여름의 잦은 안개 소식만 접하였을 뿐, 한 발자욱도 전진하지 못한 기분이다.
박진규 / 보광동 안개소년 / 자음과 모음 / 235쪽 / 2011 (2011)